• 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logo

서브이미지
subtitle
조회 수 18 추천 수 0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바로 문제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가 기독교적인가? “당연합니다. 크리스마스 보다 기독교적인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생신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 점점 크리스마스의 기념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해 왔다. 그들이 12월 25일 즈음에 열렸던 주신제(酒神際:Bacchanalia)를 주목할 때, 무언가가 옳지 못하다는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신이 아닙니까?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타락시켰으나, 여전히 놀라운 성일(聖日)로서 자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를 고집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크리스마스로 되돌리기”(put Christ back into Christmas) 위해 매년마다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 년동안 그 문제와 씨름한 후에, 성경과 교회 역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크리스마스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즉 기원이나 오늘날의 준수에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기본적이고 본질적으로 이교적인 것이다. 만약 이 사고가 새롭고 당신을 당황하게 하였다면 나는 당신에게 크리스마스가 어떤 맹점(blind spot)의 가능성이 있기에 재고(再考)를 필요로 할 정도로 고려해 보아야 하는지 당신을 초청한다.

“성일의 정신(holiday spirit)의 감각적인 호소에 내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가족들이 모이고,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꿈꾸고, ”화로에 밤을 굽고“, ”거리마다 바쁘게 성일에 맞는 스타일의 옷을 입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들이 있는, 한 해의 이 절기에 어떠한 매력이 있다.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퍼져갈 때, 이러한 감상을 가지는 사람치고 어느 누구도 향수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가장 지독한 냉소주의자도 몇 년 동안 지속되는 좋은 뜻의 어린아이와 같은 부드러운 감정을 억누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크리스마스로 되돌리자”라고 말하는 접근을 시도해 왔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크리스마스로 돌려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크리스마스의 상업성을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동의할 것이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의 기념의 물질적인 무절제에 대한 고려를 인식하며 크리스마스의 “진정한”(true) 의미에 대한 설교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묻고자 한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이 정확하게 그 본질을 알고 있다면,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 기원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오늘날 무엇을 대신하는가? 실제적인 문제는 제정(制定) 그 자체의 본질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크리스마스의 제정을 실제적으로 평가한다면,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의 문화적인 편견과 선호를 한 쪽에 내려놓는 것이며, 열린 마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해 가는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전통과 향수의 세대 속에 물들어 왔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그 사안을 객관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에게 적어도 이미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개념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우리가 크리스마스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요구한다. 솔직히 본 소고는 당신으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당신을 당혹케 만들며, 그리고 그것들이 복음의 진리와 어떠한 일치성도 갖지 않는다면 당신의 행동을 바꾸도록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I. 크리스마스의 발단 (Its Inception)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가? 그 기원은 이교적인가, 기독교적인가? 신약성경에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크리스마스를 준수했다는 어떠한 언급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출생 후, 약 300년간의 교회역사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의 기념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교회가 사도적인 교훈으로부터 표류하기 시작할 때 크리스마스가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크리스마스는 어디서 온 것인가? 표류하던 교회가 어디서부터 오늘날의 크리스마스와 연결되어, 사상과 풍속을 갖게 되었는가? 고대 세계에서 이교주의 기본 형태의 대부분의 근원은 바벨론인의 “신비주의”(mysteries)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심지어 인도나 중국과 같은 모든 고대 문화들은 바벨론에서 발견되는 신앙, 전통, 관습, 신들 그리고 여신들과 유사한 것들을 갖고 있었다. 그 이름이 다르고, 다른 수정이 가미 되었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대 종교들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태고적”(purest) 형태가 바벨론에서 발견된다. 구약시대에 바벨론은 불경건과 타락한 모든 것의 화신(epitome)이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고통은 이방 세계의 중심인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인한 가장 커다란 분개함이었다.

신약시대에, 바벨론은 로마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이방의 믿음과 고대 바벨론의 풍속을 흡수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최대의 적(arch-enemy)으로 여겨졌다. 계시록에서 로마는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으며, 이 땅의 왕들이 더불어 음행을 저지르며, 이 땅의 거민들이 그녀의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한 커다란 음녀”로 불리워진다. 그녀는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비밀(Mystery)이라, 큰 바벨론(Babylon the Great)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그리고 요한이 말하기를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고 하였다(계17:1-6).

그들의 시대에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인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물론 그들은 물리적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킬 수 없었다. 그러한 부름은 태도와 풍속에서의 영적인 분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경고를 듣고 자신들을 바벨론으로부터 분리시켰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그녀와 타협하고 그녀의 타락에 동참하였다. 기원 후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고 그녀의 영역 안에서 공식적인 종교로 선포하였다. 그가 기독교 교회를 끌어 안음으로써 진정한 기독교에 해악을 끼쳤다. 콘스탄틴 황제는 전통적인 이교적 명칭을 유지하고 동전에는 여전히 고대 로마 신들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졌다.

교회는 이교주의와 타협하는 방식을 통해서 “로마 캐톨릭 교회”로 변질되었다. 이교도의 것들을 자신의 예배 스타일로 바꾸어버린 로마 캐톨릭은 그들의 우상숭배를 따라서, 점점 더욱 그것에 빠져들게 되었다. 교회는 이교주의와 타협함으로써 수없이 많은 명목상의 신봉자를 부풀리는데 만족하였다. 이러한 접근의 모순을 뼈아프게 슬퍼하던 반대자들의 용감한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허무하게 들려질 뿐이었다.

로마교회는 오늘날까지 같은 접근 방식을 유지해왔다. 특별히 이러한 점은 중?남미 아메리카에서 볼 수 있는데, 그 곳에는 우상들이 성자들의 상들과 함께 아무런 문제없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과 전통의 일부는 심지어 혼합되기도 하였다. 금세기의 로마 캐톨릭 교회는 인디언들의 정령신(animism)들의 예배 형식에 종종 개방되어 있다.

부활절, 할로윈, 그리고 참회 화요일(Mardi Gras)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의 전통과 풍속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마스와 같은 성일(holiday: holy days)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들 각각은 고대 바벨론에서 로마를 거치고 로마 캐톨릭을 거쳐서 우리에게 온 것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빈의 제네바 교회에서라면, 당신은 아마도 크리스마스를 축하한 것으로 인해서 벌금을 받거나 감금을 당했을 것이다. 1644년 영국 의회로 하여금 소위 이교적 성일이라고 불리웠던 크리스마스의 준수를 금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사실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요구로 인한 것이었다. 그 회의의 “공적 예배 규칙서”(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의 부록에 기록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 외에 복음하에서 거룩하게 지켜져야 할 다른 어떤 날도 성경에서 명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적인 근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성일(holy-days)’ 이라고 통속적으로 불리던 축제일도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되어 있다.(James Bannerman의 The Church of Christ, vol. i, pages 406-420, 참조).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였을 때, 저들은 동일한 규칙을 시행하였다. 초기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던 청교도인들이 1620년 12월 25일, 그 날의 학문의 무지(studied neglect: 성경적 연구를 통해서 그것이 죄됨을 알고 의도적으로 지키지 아니하는 것-역자 주)로 온 종일 

일을 했던 것이다. 약 40년 동안 메사츄세츠 평의회의 법령은 그 절기를 지키는 자에게 처벌을 가하였으며, 그 법령의 일부가 “…일을 쉬거나, 금식을 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을 준수하는 것이 발견되는 자는 누구나 5실링의 벌금에 처한다”로 기록되어 있다.

19세기까지도 크리스마스는 개신교 교회에서는 어떠한 종교적 의미성도 갖지 않는 날로 여겨졌었다. 심지어 1900년까지도 남장로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준수하지 않았다. 1899년의 미국 장로교회(PCUS)의 평의회(General Assembly)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성일로서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준수할 어떠한 성경적인 근거도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이며(갈4:9-11, 골2:16-21 참조), 그러한 준수는 개혁주의 믿음의 원리에 반대되는 것이며 자의적 숭배(will-worship)를 조장하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단순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존 녹스(John Knox)와 그의 동역자들은 제자도 I권(First Book of Disciple)에 다음의 진술을 포함시켰다(1560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에 유익하니” 란 말씀을 확인한다. 교회의 지도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신구약 성경에 포함되어 있으며 충분하게 표현되어 있 음을 확언한다. 

순결의 맹세(vows of chastity), 결혼의 거짓 맹세(foreswearing of marriage), 남자들과 여자들을 몇가지의 가장 복장(to several and disguised apparels)으로 속박하는 것, 금식일의 미신적 준수(superstitious observation of fasting days), 양심적 목적을 위한 고기의 구분(difference of meat for conscience sake), 죽 은 자들을 위한 기도(prayer for the dead), 그리고 사람에 의해 제정된 특정 성 자들을 위한 성일-로마 캐톨릭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것, 예를 들면(그들의 표현대 로) 사도들, 순교자들, 동정녀들, 크리스마스, 할례, 주현절(Epiphany:동방 박사의 출현으로 상징된 구세주의 공현 축일-역자 주), 청정식(purification: 미사 끝에 사 제가 행하는 성작과 성함을 닦는 일-역자 주), 만찬,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다른 애정의 만찬(other fond feast of our Lady)의 준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율법(Laws), 회의(Councils), 율령(Constitutions)으로써 사 람들의 양심에 부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한 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명령이나 보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 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의 왕국에서 전적으로 몰아내야 한다고 판단하 며 더 나아가, 그러한 가증스러운 것들의 준수를 고집하고 가르치는 자들은 세속 행정 장관(Civil Magistrate)의 처벌에서 제외되서는 안된다고 확언한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약 이후에 여러 세기 동안 교회 안으로 유입된 것이며 종교개혁 때 폐기 되었다가 오늘날에 와서 다시금 개신교 교회 안으로 살금 살금 들어온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언제나 이교도적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기념으로 삼는 것은 그리스도나 성경적인 요소들을 근본적으로 이교 성일에 첨가하는(add) 것이라는 점이다.


II. 크리스마스의 제정(Its Institutions)

크리스마스의 잘 알려진 풍습을 살펴보고 그것들의 의미하는 바를 고찰해 보도록 하자. 나는 잘 알려진 많은 전통 중에서 몇 가지 만을 들지만 이것들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크리스마스 풍속에 대해 진실이라는 점을 당신에게 확증할 것이며 그러므로 세속 백과사전에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체크해 보도록 당신을 격려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당일인 12월 25일을 살펴보자.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사실 어느 누구도 그리스조께서 태어나신 날이 언제 인지를 알지 못하며, 12월 25일도 단지 그럴듯한 날짜이다. 그렇다면 왜 12월 25일일까?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그때에 바벨론인들은 그들의 태양신의 승리를 축하하였다. 이런 바벨론의 풍속을 답습한 로마는 태양신 솔로의 탄생 축제일로 삼고 농신제(고대 로마에서 12월에 지낸 풍속-역자주)라고 불렀다. 그것은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은 이교도적 환락의 성적인 파티였다. 그러나 교회가 이교주의에 대항하여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하는 대신에 그것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동지(冬至) 전후로 즐거움과 계절 인사를 나누는 것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은 연약하고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교회는 “가서 즐기고 기념하라. 단지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으로 지칭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교주의에로 놓치는 대신에 우리는 두 가지를 조합해서 점차적으로 이교도 중 몇몇 사람들이 기독교를 고백하도록 하는 승리를 얻을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지 말자”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러면 크리스마스 그 이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임을 알지 못한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한 미사의 로마 캐톨릭의 기념일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그리스도의 미사로 의미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로 우리 마음에 인상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면 미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로마 캐톨릭의 미사의 중심부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충분성을 부정하는 의미가 있다. 미사는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재제정(再制定: reenactment)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다(히9;12,24-26, 10:10,12,14). 로마 캐톨릭 교회는 미카엘마스(michaelmass)와 같은 많은 다른 미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마스는 개신교도들이 유일하게 준수하는 저들의 미사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절기 동안 우리 가정을 비추어주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더욱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당신은 왜 우리가 집안에 나무를 세우는지 알고 있는가? 고대로부터 나무는 이교 종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심지어 예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노르웨이족, 셀트족, 그리고 색슨족은 마녀, 악령, 그리고 유령들로부터의 보호물로 나무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야자수가 그러한 의미에서 중요하였으며, 로마에서는 전나무가 그러하였다. 이러한 의미의 연합 때문에, 우상들이 종종 나무에 새겨졌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경고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工匠)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렘10:2-4).

심지어 크리스마스 때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 탄생의 그림도 이교도의 영향에 물들었다. 바벨론의 “신비주의”로부터 전승되어 온 이교 예배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에서 모성적 여신과 그녀가 낳은 자식의 출생을 예배하는 자들의 정중함이 초점의 재상이 되고 있다.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을 뿐 그 개념은 하나같이 동일하다. 바벨론에서 그것이 하늘의 여왕과 그녀의 아들, 즉 성육화 된 태양의 아들인 타무즈(Tammuz)에 대한 예배로 나타난다. 태양의 아들이 동지날에 탄생하였다. 율(Yule:크리스마스 축제의 단어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역자 주)은 아이나 아기의 바벨론적 이름이며, 율데이(Yuleday)는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훨씬 전, 12월 25일에 축하되었다. 그 다음에, 당신은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마굿간 장면을 볼 수 있으며, 거기서 마리아와 예수님의 머리 주변에 후광이 있는데, 이러한 로마 캐톨릭적 개념이 바벨론의 “신비주의”에서 빌어 왔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신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도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것을 기억하라(출20:4).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이러한 계명들을 진지하게 지키고 있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계명들을 벗어나 그것들을 핑계삼아 왔던가?

산타클로스는 어떤가? 산타클로스가 미국인들의 대다수를 위해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그 누가 심각하게 부인할 수 있을까? 나는 로마 캐톨릭의 성자로서 추앙받는 그의 기원에 대한 잘 알려진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 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는 해롭지 않으며 유쾌하며 뚱뚱한 난쟁이 요정인가, 아니면 “없는 자들을 위한 위로(something for nothing)”로서 탐욕과 물질주의 이기주의에 반대하는 기독교적 상징이 되었는가? “우리에게 있어 도대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산타클로스 애기를 해주는 부모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녀들의 신뢰성을 위험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당신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로 이 벽들을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가 아무런 의심없이 그들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믿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구원을 얻는데 지혜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심지어 “신성의 신비로움과 그 하나님이 육체로서 드러내신” 것을 성경으로부터 가르칠 때 그들이 우리를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현대의 미국인 이교도들이 하나님에 대해 믿는 모든 것은 산타클로스 안에 요약될 수 있다. 그는 그 해의 의미없는 대부분의 활동보다는 차라리 좋은 생각에 분주하게 관여한다. 그는 악의가 없고 친절한 길고 하얀 수염을 가지고 있는 노인으로서 북쪽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는 일년에 한 차례 그의 사람들을 방문하는데 나머지 364일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아이는 북극에 있는 그에게 편지를 쓰겠지만 의사소통은 일방향적이다. 즉 산타는 일상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산타의 눈에 들만한 유일한 길은 “착하게” 지내는 것이다. 산타는 “나쁘게” 지냄으로 주어지는 결과에 대해서 경고하지만, 그러나 그의 말은 실제로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아이는 그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알며, 심지어 그는 다소간 불안함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난 해를 기억하고 산타가 무엇을 말하든 또는 아이가 무슨 행동을 했든지와는 상관이 없이 마지막에는 산타가 자신에게 보상을 해줄 것이라는 점을 안다. 산타는 사람을 지옥과 그를 이러한 방식의 삶으로 살도록 유지시키기 위한 판단을 가지고 위협하는, 그러나 또한 한 가지 방식으로 또는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게 될 신(神)으로 표상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 얘기를 들려준다면, 당신은 부지불식간에 그들에게 비성경적인 초월성의 개념을 세우는 소재를 제공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산타를 신의 수준으로 높이고 그에게 행운의 일곱 신 중에서와 같은 동일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한 자유주의 개신교인이 최근에 성 니콜라스가 교회 연합운동(ecumenical) 차원에서 진정한 첫 성인이 될 수도 있다고 제안한 사실에 놀라지 말라. 그는 개신교 뿐만 아니라 보통의 이교도와 보통의 로마 캐톨릭 양 자가 그 운동에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그 오랜 친구(산타-역자 주)를 존경하는 불교신자나 모슬렘 신자들도 우리와 함께 교회 연합운동의 길에 같이 걸어 갈 것이다…. 그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낫다’라는 가르침을 지난 수천년 동안 어떤 교인들 보다도 더욱 넓게 전파해 왔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가 말한 전부이다,

그러나 선물을 주는 것이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사랑스런 방식인가? 확실히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다는 것에 대해 비기독교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다른 측면들이 이것보다 더욱 일탈되었는가?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지도 않은 선물을 사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돈을 지출한다.” 쇼핑을 하기위해 상가를 헤매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친 짓인가? 12월 25일을 전후로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검약과 겸손과 자기 부정의 삶을 사셨고, 허영과 자기 탐닉을 책망하시고 우리에게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어느 누가 진지하게 제안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크리스마스를 위해 수백, 심지어 수천 달러를 지출하지만, 동시에 우리나라의 복음사역이나 도움이 필요한 선교지에는 거의 한 푼도 지출하지 않는다. 사실 되돌려 받으려고 하는 충동이나 기대로부터가 아닌 진정한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일년 내내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관되는 이 때가 되면 필경 열리는 파티, 흥청거리는 술잔치, 방탕함들은 무엇인가? 왜 다른 어떤 때보다 이 때가 더욱 아낌없이 술이 넘쳐 흐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다른 시기보다 “거룩한 절기” 동안에 교통사고가 더 많이 발생하는가?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나 마굿간 정경의 기원에 관한 핑계를 할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만약 당신이 우리 주님의 성육신을 흥청거리는 술잔치나 방탕함의 변명으로서 사용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되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제 질문은 이것이다. 크리스마스 절기를 즈음해서 있게되는 이러한 곡해(曲解:travest)의 모든 것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와 모순되는가? 또는 오늘날 이것이 그 기원과 역사로부터 발생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인가?

그렇지만 크리스마스에 따르는 전통들이 아무런 해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충분히 결백하지 않은가? 아니면, 그 전통들이 결백한가? 사탄이 어떻게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시험하는가? 그는 우리를 격퇴하기 위해 무섭고 기괴하게 보이는 것들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가? 그가 붉은 옷을 입고 꼬리를 가진 모습으로 어둠의 뒷골목에서 뛰어나와 삼지창을 휘들러대며 말하기를 “나는 악마다. 나는 어를 속이기 위해, 그래서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왔다”라고 말하겠는가? 물런 아니다. 사탄의 속임수는 교묘하다. 그는 자신을 “광명의 천사”(고후11;14)로 가장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해롭지 않고”, “결백하고”, “재미있는” 것들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신실한 그히스도인들도 종종 인간들의 전통을 통해서 미련하게도 우상숭배로 빠져든다.


III. 크리스마스의 함축된 의미들(Its Implications)


본 소고로부터(그리고 우리가 단순하게 그 표면적인 부분만을 다룬) 결론들을 내려보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미사(Christ-mass)와 그 모든 전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는가? 내가 판단해 볼 때, 우리는 오직 3자택일 대안을 가지고 있다.

1. 우리는 “그리스도를 크리스마스로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며, 이러한 철저한 이교도적인 성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을 구원하기 위해, 지고 있는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를 이교적 축제에 되돌리고 있는가?”란 기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진정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

2.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크리스마스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교적인 요소들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제거되어 왔으며 그 전통들은 그들이 우상숭배로부터 어떻게든 정화되어 왔다고 추론함으로써 그것을 문화적인 민속 축제의 한 종류로 준수할 수 있다. 그것은 더욱 일관되게 보이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문제점들이 있다. 즉 당신의 비기독교적인 친구들이나 사회는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시키며,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신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 절기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러한 이교적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그것들의 우상숭배적 기원으로부터 자신들을 무관한 것으로 여기면서, 문화적인 유산의 한 종류로서 간주하여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시종일관된 기독교인의 증명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는가?

3. 오직 유일한 대안은 크리스마스를 철저하게 폐기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일관된 과정으로 확신한다.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줄로 안다. 나는 여러 번 그들로부터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일관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왔다. 물론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일관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일관되어야 할 의무, 즉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모든 성경적인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감한 노정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 그것은 매우 과감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오늘날 이교의 물결을 저지하려고 하거나 심지어 그것에 도전하려고 한다면 과감한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철저한(극단적인:radical) 제안이 아닌가? 그렇다. 사실 참된 기독교는 철저한 신앙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과감한 방법을 취한다면 광적인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도 광적으로 여겨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핍박 받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미미한 핍박을 대면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라. 우리가 성경에 일과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의 믿음과 행실이 저들이 하는 것보다 더 이상이 되지 않을 때 뭔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이점에 있어서 타협을 하게 된다면 왜 우리는 다른 것들과, 또 다른 어떤 것들, 그리고 다른 것들과 타협하지 않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오늘날 왜 우리가 핍박을 받지 않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종종 도달하는 결론은 믿음있게 행한다면 반드시 핍박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왜 세상이 우리를 증오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세상이 가지고 있는 개념인,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세상의 사고에 도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세상은 복음을 민족종교로 대체하고 말았다.

마르틴 루터는 “만약 내가 큰 목소리와 최고로 분명한 주석을 통해서, 세상과 악한 영들이 그 순간 공격을 가하는 문제를 엄밀하게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진리의 모든 부분을 고백한다면 그 때 나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는 것이며, 고백하더라도 뻔뻔스럽게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전투가 격한 곳에서 병사의 충성심은 요구되는데, 만약 그 때에 충성심의 옷을 벗어 던지게 되면, 여타의 모든 전장에서 충성된 것은 그저 패주이며 치욕인 것이다.”

“그것은 행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리스마스 전통은 너무도 확고하게 우리 사회에, 심지어 흐름을 역행하기 가장 힘든 우리 마음 속에 가지를 뻗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려운가?“가 아니고 ”그것이 옳은 것인가?“이다. 옳은 것은 언제나 쉽지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을 따르는 우리에게 쉽게 잘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우리처럼 아주 용이하다면, 어딘가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한꺼번에 쓰레기로 처분할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긍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첫째 이유는, 우리 개신교의 조상들이 너무나도 주의를 다하여 크리스마스를 피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신앙과 그 행함의 거짓됨이 없는 유일한 규례인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그 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의 구원, 믿음, 그리고 생명을 위한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논은 성경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거나, 또는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인해서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어느 시대에 어떤 것도 성령의 새로운 계시나 인간의 전통에 의해서 성경에 더해질 수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납한 방식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제정되며, 그 분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 제한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모방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 어떤 가시적인 표상물들이나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여타의 다른 방식에 따라서 예배 받으시지 않으신다.”(21장 1항).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7:8,13)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근심하며 갈라디아 교회에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갈4:10-11)고 편지 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명해진 그러한 절기를 준행한 것에 대해서 책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과 반대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절기를 준수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해를 따라 지키는 종교적 준수의 강조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는 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이 점을 말하는 것을 즐기고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어느 누구도 크리스마스를 도적질했던 스크루지나 그린치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일하면서 진정한 의문은 내가 말한 것이 성경적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것을 세심하게 고려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당신은 이 점에 대한 나의 성경적인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즉 당신이 역사적 배경과 현재적인 상황에 대한 나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 역시 틀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이 메시지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베뢰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해 가졌던 태도와 같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당신은 열린 마음으로 정직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당신 자신을 위한 증거들을 평가해야 하며, 당신 스스로의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당신은 설교자에 대해서 그러한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이에 표현된 강한 대조가 의미하는 바를 지적하고 있다. 그 대조는 우리 시대에 간과되어 왔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6:17).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 사상은 세상으로 하여금 의제를 작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세상으로 하여금 결정권(call the shot)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거나, 기준을 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지만, 그러나 세상의 일원이 되면 안된다. 그는 다른 나라의 시민이며,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순례자인 것이다. 그는 동료와 보조를 같이 할 수 없는데 이는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문제시하는 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적인 크리스마스를 가질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종교적인 측면은 크리스마스의 최악의 부분이다. 더 이상 크리스마스보다 문화적 종교와 성경적 신앙 사이의 대조가 극명한 본보기가 없다. 크리스마스는 실제적으로 세상을 진정한 복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멀게하는 모방복음(imitation gospel)을 싹틔운다. 크리스마스는 세상이 쉽게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대리적인 복음을 선물한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는 단순히 “사랑, 평화, 주는 정신, 선한 의지의 감정”이다.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stripped-down) "복음“은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의 이해로부터 멀게(방해) 하기에 충분한 사상의 불어넣기를 줄 뿐이다.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사랑하는데 이는 크리스마스가 마굿간 안에 있는 아기의 감동적인 장면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을 마굿간의 어린 아이로 고정시킨다. 예수님은 크리스마스에 의해서 잘못 표상화 된다. 복음 역시 크리스마스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크리스마스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종교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하고, 자신들이 매우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잠시동안 종교적이 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그들에게 이 점을 행할 수 있도록 완벽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 기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정신에 참여하는데 완벽하게 안전하다. 당신은 성령이 없이, 그리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고서도 크리스마스의 영(靈)을 가질 수 있다.

크리스마스의 그러한 대중성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다. 모드 이교도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불교신자들도 그 축하에 참여한다. 실제적으로 12월 25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세상이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칠일 중 하루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으니 곧 주님의 날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날을 주일로 지키는가? 세상은 그 날과는 상관이 없다. 완전히 죄된 세상이 아무런 가책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기념일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의심을 품어봄직 하지 않은가? 계속적으로 주님의 날을 더럽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크리스마스 때에는 어떻게 하든지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대단한 열정을 보인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의 주님 됨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당신은 기꺼이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이 전반적인 사안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실하게 생각할 용의가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을, 심지어 그것이 당신의 사고나 실행에 있어서 과감한 변화를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행할 용의가 있는가? 이것이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갈등인 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왔다. “나는 그것에 관한 책을 읽기도,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원치 않아요. 나는 어쨌든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즐기고,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겁니다.”(의미하는 바는 하나님 조차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것임). 그럴 때 크리스마스는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하시더라도 포기하기를 거절하는 그 어떤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훈계는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실제로 주의를 기울이는 구체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점을 헤아릴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이것이니, 당신은 이 점에 대해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니이다”, 또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신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
  • ?
    정병선 2018.12.04 21:22
    네, 좋은 글을 찾아 나눠주셨습니다.
    너무나 당연시 된 크리스마스를 다시 곱씹어보게 하는 글, 올려 줘서 잘 읽었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크리스마스 기독적인가 by Michael Schneider 1 엽산 2018.12.03 18
832 44년만의 명예 졸업장 - 더불어 가는 실천 지성을 위하여 file 엽산 2018.11.30 17
831 또 다른 복음 정병선 2018.11.15 31
830 하나님의세계 (김진혁교수 지음 ) 상 (예책)- - review 1 엽산 2018.10.24 72
829 내가 누구인지 더 알아가는 file Tsutsui 2018.10.02 108
828 2018 여행 예배 후기 2 엽산 2018.07.31 140
827 감사의 시간 - 김연희 권사 정병선 2018.06.08 110
826 오두막 강좌 후기 - 한백병 장로 1 정병선 2018.06.07 132
825 오두막 강좌 소감문 - 김경란 권사 정병선 2018.06.07 79
824 구원론이 이론이 아닌 구원 그 자체가 되기를 1 보석 2018.06.07 87
823 오두막 강좌 수강을 마치며 정지윤 2018.06.07 73
822 살아있는 말씀의 신비를 깨닫다.(김기숙님)-임현미 대신 올려요.~~ 임현미 2018.06.07 80
821 오늘 여기에서, 다시 또 주님과 함께 세상 속으로 임현미 2018.06.07 76
820 구원론을 다시 공부하며...... 정병선 2018.06.07 81
819 구원 - 창조의 신비로움속에 놀라운 신비함에 매료되는 해방과 자유의 삶 엽산 2018.05.24 99
818 2차 말씀샘교회 오두막 강좌 file lilietoile 2018.03.08 133
817 김동건 교수의 새 책, 『예수: 선포와 독특성』 예수에 대한 감동의 대서사시 file 김성수 2018.02.09 132
816 2018겨울 어린이 꽃동산성령체험캠프 한어선 2017.11.16 99
815 선교사자녀 학비 전액지원 안내 file 시냇가에심은나무학교 2017.10.26 145
814 말씀을 묵상하며- 1 file 딸기곰 2017.10.13 133
813 재미를 알것같아 1 사슴발걸음 2017.10.08 169
812 말씀으로의 초대 file 딸기곰 2017.06.27 106
811 구원을 살라 <오두막 강좌 후기> 1 이진숙 2017.06.08 167
810 구원의 퍼즐 1 장상은 2017.06.08 123
809 작은 날개를 달다 1 단비 2017.06.08 90
808 비밀의 정원 1 딸기곰 2017.06.08 129
807 구원론을 통해 나의 삶를 열다~ 1 박선이 2017.06.08 94
806 오두막 강좌 구원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가 1 광수생각 2017.06.08 111
805 창조 구원의 새로운 경험속에서 맛보는 진리속의 진실 1 엽산 2017.06.07 91
804 구원 이해에 눈 뜨는 즐거움을 맛보다 1 임현미 2017.06.06 102
803 오두막 강좌를 마치며... 2 나비 2017.06.05 98
802 내가 알아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정재선 2 피카소 2017.06.05 112
801 오두막 강좌(당신의 구원 이해, 이대로 괜찮은가?) 소감문 - 김현정 2 치로맘 2017.06.05 101
800 2017여름 어린이 꽃동산성령체험캠프 안내 한어선 2017.04.13 78
799 새해를 여는 기도문 - 이어령 정병선 2017.01.04 154
798 총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주말반 17기 모집안내 김대영 2016.12.29 116
797 2017겨울 어린이 꽃동산성령체험캠프 김하늘 2016.11.07 205
796 2016년 일본 후쿠오카 단기선교 안내입니다~! (8월 1일-5일) 이진환 2016.07.09 432
795 2016 여름 비전파워(오병이어) 비전캠프 [키즈/청소년/청년] 오병이어 2016.07.06 422
794 오늘 예배후 구갈 레스피아에서 해피타임!! 9 치로맘 2016.05.01 652
793 2016여름 어린이 꽃동산성령체험캠프 한어선 2016.04.18 1509
792 안녕하세요?선교사님! 박성재 2016.03.21 1605
791 칼 바르트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정병선 2016.03.12 1419
790 네팔에서 강대권 선교사 강대권 선교사 2016.03.11 1418
789 교회력에 따른 절기와 상징 색 김혜란 2016.01.13 1729
788 주현절의 의미 1 김혜란 2016.01.13 1740
787 빵집일기2- 예쁜 정화 2 김혜란 2015.12.18 1630
786 빵집일기1-미역국을 끓이는 상철이 4 김혜란 2015.12.08 1472
785 세상에 이런 일이 13 정병선 2015.10.15 1149
784 김지영/김희수선교사(캄보디아)의 선교편지 2 송희곤 2015.09.27 160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