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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38-자유의 율법

2016.09.18 16:57

정병선 조회 수:354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8:31-36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918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918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XTMZwMJIk7M

(MP3 듣기: 2016년 9월18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 https://www.youtube.com/watch?v=XTMZwMJIk7M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을 오해하고 사는데 그중에 하나가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이 시대를 ‘자유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맘껏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맞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자유가 넘쳐나는 자유 홍수 시대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오늘 이 시대는 ‘자유의 홍수로 인해 자유가 없는 시대’입니다. 홍수가 나면 천지가 물인데도 마실 물이 없어 난리인 것처럼 오늘날 자유도 넘치고 넘치는데 자유가 없어 난리입니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근대사회를 도처에서 개개인을 감시하고 평가하며 처벌하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근대사회는 왕과 영주들이 지배하는 중세 봉건사회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감시’와 ‘처벌’이라는 새로운 권력 시스템이 작은 부분까지 작동하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를 만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고 있습니다. 도로마다 도로교통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거리마다 CCTV가 설치돼 있고, 빌딩마다 CCTV가 설치돼 있어서 어디를 가도 감시와 처벌이라는 사회구조로부터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온 세상에 자유가 넘치는데 어디에도 자유가 없습니다. 가정에도 자유가 없고, 학교에도 자유가 없고, 직장에도 자유가 없고, 사람들의 내면에도 자유가 없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자유가 넘치는데 자유가 없어요.

사람은 자유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가난해도 여전히 사람이고, 아는 게 없어도 여전히 사람이고, 팔이 없어도 여전히 사람이고, 보지 못해도 여전히 사람이고, 듣지 못해도 여전히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유가 없으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모습과 기능을 다 갖추었다 하더라도 자유가 없으면 보고 듣고 말하는 동물일 수는 있지만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자유가 있어야 사람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유의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유의 존재이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유의 존재이고, 자유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가 없으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람은 찢어지게 가난하더라도 여전히 사람이고, 아는 게 없더라도 여전히 사람이고, 팔이 없고 보고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이지만 자유가 없으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온 세상을 준다 해도 자기 목숨과 바꾸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돈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마는 그래도 돈과 자기 목숨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또 성공하기 위해서 죽을 똥 살 똥 모르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성공과 자기 목숨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자유와 자기 목숨을 바꾸는 경우는 더러 있습니다. 자유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자유란 이처럼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특별한 것입니다.

이제 갓 두 돌이 지난 ‘은혜’를 봐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자기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하거나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같으면 즐겁게 놀다가도 갑자기 신경질을 냅니다. 뭘 해주려고 해도 자기가 한다고 싫어합니다. 사실 자유가 뭔지도 모르잖습니까.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데 온 몸으로 자유를 주장합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참 대단해요. ‘은혜’를 보고 있으면 ‘사람은 역시 자유의 존재’라는 걸 실감합니다. 사람이 그래요. 사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듯 자유를 먹어야 사는 존재, 즉 자유의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는 밥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자유를 잃었습니다. 자유 없이는 살 수 없는데 자유를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요8:34). 여기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은 사실상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왕도 죄의 종이고, 억만장자도 죄의 종이고, 교양 넘치는 신사숙녀도 죄의 종이고, 법을 집행하는 검사와 판사도 죄의 종이고, 천진난만한 꼬마 아이도 죄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라는 말 속에는 사람이 자기 의지로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죄를 범하고 싶지 않아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옳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채 죄의 종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왜 그토록 소중한 자유를 잃어버린 것일까요? 바로 자유 때문이었습니다. 자유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에덴동산 이야기를 봅시다. 첫 사람 아담에게는 분명히 자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 열매를 자유롭게 따먹게 하셨습니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1:26). 여기서 ‘다스리라’는 말은 ‘자유롭게 경영하라’는 뜻입니다. ‘왕적인 지위를 갖고 세상을 자유롭게 경영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담에게 실로 영광스러운 자유를 줬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자유는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큼은 먹으면 안 된다는 한계가 있는 자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함으로써 아담의 자유가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니라 제한이 있는 자유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담도 이 사실을 충분히 숙지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숙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결국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써 넘지 말아야 할 자유의 경계선을 넘어갔습니다. 무제한적인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자유의 경계선을 넘어갔습니다. 그 결과 자유가 파괴됐습니다.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잃음으로써 죽음에 떨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담 이후의 인간의 처지입니다. 아담이 자유로써 자유를 잃어버린 이후로는 모든 인간이 자유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왕이든, 억만장자든, 길거리의 장삼이사든, 꼬마 아이든 다 똑같습니다. 다 자유를 잃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삶을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너무도 영광스러운 자유, 자기 생명과도 맞바꿀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삶이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복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이나 경험과는 사뭇 다른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진리는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는 진리를 거스른다고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 계층은 언제나 진리의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통제해왔기 때문에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기독교도 그랬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 율법의 이름, 진리의 이름으로 수많은 죄악을 범했습니다.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고, 인디언들을 자기네 땅에서 몰아내고 죽였습니다. 성도들을 억압했습니다. 한국교회도 진리의 이름으로 일본의 한국 통치를 정당화하며 협력했고, 일본이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을 할 때 젊은이들을 군대로 보내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축복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에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진리를 불편해하고,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은 자유를 불편해합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항상 두 흐름이 있었습니다. 진리로써 자유를 억압하는 흐름과 자유로써 진리를 거스르는 두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흐름 중에서 진리로써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흐름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해왔습니다. 영국은 1215년에 왕의 독재를 막기 위한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를 선포함으로써 왕의 권한을 법으로 규정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서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켰습니다. 프랑스는 1789년에 대혁명을 일으켜서 중세의 왕정 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여성을 오랜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인간의 이성을 신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신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유의 역사를 써내려갔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습니다. 수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피를 흘린 덕분에 우리는 지금 전무후무한 자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맘껏 읽고, 쓰고, 말하고, 일하고, 쇼핑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요? 사람들이 진짜 자유를 향유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우리는 지금 엄청난 자유 속에서 자유의 빈곤을 느끼고 있습니다. 군중 속에서 가장 큰 외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넘치는 자유 속에서 자유의 빈곤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넘치는 자유로 인해서 자유가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국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양심이나 도덕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자유, 이 자유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했고, 그로 인해서 자유가 파괴된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자유를 파괴하는 최고의 무기는 자유입니다.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를 파괴하고, 우리들의 자유가 너희들의 자유를 파괴하고, 국가의 자유가 백성의 자유를 파괴하고, 검사의 자유가 피의자의 자유를 파괴하고, 돈의 자유가 노동자의 자유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치명적인 사회악을 낳습니다. 물론 우리는 날마다 돈 때문에 갈등하고 싸우고 심지어 가족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익과 너의 이익이 충돌하는 것 때문에 피터지게 경쟁하고 싸우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충돌하는 것 때문에,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갈등하고 싸웁니다. 남편이 밤늦게까지 술 마실 자유를 누리는 것 때문에 아내가 고통당하고, 자식이 경계 없는 자유를 고집하는 것 때문에 부모의 속이 타들어가고, 대통령이 인사권이라는 자유를 맘대로 행사하는 것 때문에 백성이 나라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가 무정부상태를 낳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가 허무와 죽음을 낳습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자유가 자유를 짓밟고 파괴합니다.

 

예수님이 제대로 말씀했습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진리가 자유를 선물하지 자유가 자유를 선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낸 후에 제일 먼저 십계명을 주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십계명이라는 진리 없이는 참된 자유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참된 자유의 삶을 살라고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십계명뿐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몽땅 자유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자유에로의 안내서’입니다. 에덴동산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한 것도 자유의 삶을 위해서였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것도 자유의 삶을 위해서였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보내신 것도 몽땅 자유의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표현했습니다(약2:12). ‘자유의 율법’, 매우 모순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자유와 율법의 관계를 정확하게 꿰뚫은 표현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율법과 자유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율법은 자유를 보호하고, 자유는 율법을 세웁니다. 하나님은 자유와 율법이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물론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사람은 율법으로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로 율법을 파괴해왔습니다. 지배계층은 율법 없는 자유를 위험하게 생각하고 율법으로 자유를 억압해왔고, 민중은 자유를 억압하는 진리를 거부하며 자유로 율법을 파괴해왔습니다. 아마 종말의 날까지 이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이 싸움을 끝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진리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리로 사람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자유와 율법이 예수님 안에서 조화롭게 성취됐습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율법과 자유가 대립하지 않습니다. 대립하기는커녕 서로를 돕습니다. 율법으로 자유를 얻고, 자유로 율법을 세웁니다. 율법과 자유가 서로를 통해 온전케 됩니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온 선물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과 자유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세계,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온 선물이고, 이 선물이 곧 구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율법과 자유가 더 이상 대립하지 않는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세상의 상식과 경험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오늘도 율법은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는 율법을 파괴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런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상식과 경험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상식과 경험에 기초해서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에 기초해서 살아야 합니다. 율법으로 자유를 얻고, 자유로 율법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배우고 실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무입니다.

우리가 말씀샘교회 안에서 정말 힘써야 할 일도 다른 게 아닙니다. 선교도 아니고 구제도 아닙니다. 진리로써 자유를 양육하는 일, 자유로써 진리를 양육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진리와 자유가 공존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정직하게 선포되고, 온 성도가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멈추는 자유, 너의 자유 앞에서 멈추는 자유를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에 능동적인 순종을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살 수 있습니다. 말씀샘교회가 삼위일체적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율법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율법 없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율법 없는 자유는 허구예요. ‘너’ 없이 ‘나’가 존재하겠다는 것만큼이나 허구입니다. 아담을 생각하십시오. 아담은 율법 없는 자유를 꿈꾸다가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없는 자유를 꿈꾸지 마십시오. 율법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닐뿐더러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자유는 오직 율법(진리) 안에 있습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에 매여야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진리로부터 자유로워서는 절대 자유할 수 없어요. 자유를 부르짖어서는 절대 자유할 수 없어요. 오직 진리에 매여야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롬6:18,22). 여러분은 율법 없는 자유를 꿈꾸는 허풍선이가 되지 마십시오. 율법 있는 자유를 살아내는 옹골찬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