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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33-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2016.08.14 17:49

정병선 조회 수:600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8:12-21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814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814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EJDfyrdOqMc

 

(MP3 듣기: 2016년 8월14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EJDfyrdOqMc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스라엘이 열방의 머리가 된다거나,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한다거나, 지구가 유토피아가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이야기,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에 도래했으니 그 나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이 열심히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예수님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하늘에서 왔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생수의 원천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나를 믿으라, 내 판단은 의롭다, 등등 예수님은 온통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증의 주제는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보통 자신의 존재와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도취된 사람을 가리켜 나르시스트(자기애주의자)라고 하는데, 예수님을 언행을 보면 마치 나르시스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자기에게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르시스트인 걸까요? NO. 예수님은 나르시스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연약한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순종하신 분입니다. 자기 몸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를 기뻐하신 분입니다. 자기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와 보냄 받은 세상에 집중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항상 자기 자신을 변증하기에 힘썼습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도 처음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설파했지만 나중에는 예수님 자신을 변증하기에 힘썼습니다.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7:16),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고 말하며 자신을 변증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변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 아침에 물 붓기 의식을 행할 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 예수님은 저녁이 되자 또다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라고 외쳤습니다.

 

초막절은 물과 빛의 절기입니다. 아침에는 ‘물 붓기 의식’을 행하고 저녁에는 금으로 만든 등잔에 불을 켜는 ‘빛 의식’을 행했습니다. 초막절의 밤이 되면 사람들은 성전 뜰로 내려갑니다. 그곳에는 황금으로 만든 등잔대들이 있고, 각각의 등잔대위에는 네 개의 황금 주발(등잔)이 있고 등잔대 곁에는 사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해가 지고 불을 붙일 시간이 되면 제사장 계열의 네 젊은이가 손에 기름 종지를 들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등잔대 위에 있는 주발에 기름을 채웁니다. 주발에는 제사장의 속옷과 허리띠로 만든 심지가 담겨 있는데 그 심지에 불을 붙입니다. 불이 켜지면 예루살렘의 뜰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그때 경건한 사람들이 무리들 앞에서 손에 횃불을 들고 춤을 추며 노래와 찬양을 부르며 초막절의 밤이 깊어갑니다.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이런 의식을 행하는 것은 선조들이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하던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이 말랐을 때 반석을 쳐 물이 솟구쳤던 것을 기억하며 ‘물 붓기 의식’을 행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준 것을 기억하며 ‘빛 의식’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빛 의식’이 거행되는 예루살렘 성전 뜰에 서서 크게 외쳤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v.12).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밝히는 빛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빛은 어떤 빛일까요? 성경에 보면 세 가지 유형의 빛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첫째 날 창조한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우주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창1:3). 이 빛은 눈에 보이는 빛 이전의 빛입니다. 붉은 태양에서 나오는 빛 이전의 빛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넷째 날 창조한 빛(태양)이 있습니다(창1:14-19). 세 번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을 때의 빛이 있습니다(요일1:5).

초막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은 세 번째 유형의 빛 -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했을 때의 빛을 말합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췄다고 했는데(행26:13) 사울이 보았던 그 빛 또한 세 번째 유형의 빛입니다.

 

그런데 어떤 유형의 빛이든 빛과 세상은 의미심장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우주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빛이 모든 것의 근원이다, 빛이 있어야 무엇인가가 존재할 수 있다, 빛이 없는 세계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빛이 없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빛으로부터 출발하고 빛으로 인해 존재하는 세계, 빛으로 충만한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초막절날 밤에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세상에 빛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둠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빛으로부터 출발하고, 빛으로 인해 존재하고, 빛으로 충만한 세계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세상에 빛이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사도 요한 또한 예수님의 오심을 ‘빛이 어둠에 비췄다’고 표현함으로써 세상이 온통 어둠이라고 보았습니다(1:5).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온 세상에 충만한 빛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맨 먼저 창조한 빛은 지금도 변함없이 세상에 충만합니다. 넷째 날 창조한 태양은 오늘도 찬란하게 빛을 뿜어냅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도 여전히 온 세상을 품고 계십니다. 세 가지 유형의 빛 중 어느 빛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빛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요한도 세상을 어둠이라고 말했습니다. 예, 모두 옳습니다. 세상에 빛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옳고, 세상에 빛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옳습니다.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엄정한 진실입니다. 빛은 있으나 빛이 없습니다. 분명히 빛은 있는데 빛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빛을 외면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본래 빛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그러한 것처럼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빛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한 지식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눈이 밝아졌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의 눈이 뜨였습니다. 그런데 지식의 눈을 뜨자말자 빛을 보는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지식의 눈을 뜨자말자 존재와 삶 전체가 빛을 잃고 어둠에 떨어졌습니다. 아담이 우둔해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아담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지식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인간의 지식은 무한히 발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광명천지(빛과 밝음이 가득한 세상)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인간은 지금 지식이라는 찬란한 빛 속에서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한 빛과 하나님이신 빛은 잃었습니다. 지식의 눈은 밝아졌지만 하나님의 빛은 잃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를 가리켜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끝없는 탐구로 찬란한 기술문명과 고상한 지식문화를 이룩했고, 인간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지만,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죽음이요 어둠이라고 일축합니다.

사실입니다. 인간은 죽을 똥 살 똥 모르고 지식의 촛불을 밝히고, 문명의 바벨탑을 하늘 높이 쌓아올렸지만 세상은 칠흑같이 어둡고, 삶은 끝없이 곤고하고 공허합니다. 지식의 촛불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문명의 바벨탑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인간의 내면은 더 어두워지고, 삶의 속내는 더 부패해갑니다. 빛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빛이 있지만 인간이 빛을 외면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빛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온 세상이 빛을 외면하고 거부하며 빛을 보지 않기 때문에 어둠이 정치  경제  교육  철학  종교  예술  과학기술  외교  가정  학교  정부 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고, 어둠이 이 모든 걸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  경제  교육  철학  종교  예술  과학기술  외교  가정  학교  정부  기업이 이리저리 뒤틀리고 왜곡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을 향해 선포했습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선포는 오래 전 광야의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이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 선포입니다.

잘 알다시피 광야의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은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잘 알고 있는 이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앞에 떠오른 장엄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었습니다. 신명기 9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떠오르면 움직였고, 구름이 내려앉으면 진을 쳤습니다. 아무리 마실 물이 있고 쉴 만한 그늘이 있어도 구름이 움직이면 함께 움직였고, 아무리 메마른 광야에 마실 물이 없더라도 구름기둥이 머물러 있으면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렀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했습니다(민9:15-23). 모세는 이것을 가리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다고 말했습니다(9:18,23).

 

이런 역사적 배경을 깔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들립니다. ‘오래 전 광야의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었으나 지금 온 세상 사람을 인도할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바로 나다. 내가 바로 광야의 불기둥이요 구름기둥이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불기둥이나 구름기둥보다도 더 온전한 빛이십니다. 이스라엘만을 인도하는 빛이 아니라 온 세상을 인도하는 빛이십니다. 온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을 때의 그 빛이십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빛이시고(1:14), 신성의 모든 충만이 넘치는 빛이십니다(골2:9).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빛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봐야만 빛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이라는 빛을 봐야만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것들, 깊은 어둠에 감추어졌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즉 눈에 보이는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보게 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도 보게 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충만하다는 것도 보게 되고, 온 세상이 어둠에 깊이 잠겨 있는 것도 보게 되고, 내 안에 죄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도 보게 되고, 내가 어둠의 자식이라는 것도 보게 되고, 그런 세상과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도 보게 됩니다. 정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만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과 만사가 새롭게 보입니다. 지식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놀라운 신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이 신세계가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홀로 빛이신 예수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히12:2).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만이 빛을 볼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을 본 자는 그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빛을 보게 되면 빛을 따라가듯이 빛이신 예수님을 본 자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은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서로를 죽이는 죽임살이 하지 않고, 서로를 살리는 생명살이 한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살지 않고, 생명을 산다는 말입니다.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빛의 자녀로 산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공허한 말이 아닙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진실로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살게 됩니다. 생명살이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됩니다(엡4:22-24).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앞에 자기를 굴복시키게 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습니다. 도깨비 방망이로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쏟아지는 것처럼 마술적인 방식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안에 죄의 속성이 너무 깊기 때문에, 어둠과 죽음에 너무 길들어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열 번 백 번 패배하면서 단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을 본 자는 반드시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는데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 예수에 대한 정보만 들었을 뿐이지 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빛이신 예수님을 본 자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그 빛을 따라갑니다. 오물을 뒤집어쓰고 엉금엉금 기면서라도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유념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자이지 빛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종종 자기가 빛의 주인인 것처럼, 빛을 소유한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마5:14)이라고 했기 때문에 자기가 빛인 것처럼, 자기가 빛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너희 빛을 비추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의 빛을 비추라는 말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주인이 아닙니다. 빛을 소유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따르는 자요 빛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일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어둠에 다닐 수밖에 없다 그 말입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를 수밖에 없고, 세상나라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 말입니다. 정말이에요. 우리는 빛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을 소유한 자가 아닙니다. 빛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빛이시고, 예수님만이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홀로 빛이신 예수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히12:2).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바라보며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따라 행진하고, 구름기둥이 머물면 함께 머물렀던 것처럼 그렇게 매 순간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매 순간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것만이 어둠에 다니지 않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