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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31-예수를 거부한 자들

2016.07.31 18:53

정병선 조회 수:363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7:25-30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731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731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t7yjDPMuXS0

(MP3 듣기: 2016년 7월31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t7yjDPMuXS0

 

예수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독특한 분입니다만,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과 유대인들, 예수님과 형제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뭘까요? 예수님은 다른 데서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영광을 구했느냐’에서 찾았습니다. 즉 예수님은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며 산 반면, 여타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산다는 것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며, 그 속에 불의가 없다고 했습니다(v.18). 맞습니다. 사람은 잘났든 못났든 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은 다 불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에는 불의가 없습니다. 오직 의로 충만합니다.

 

유대 당국자들은 이처럼 의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유대(예루살렘)로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초막절 중간쯤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가르쳤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맨 몸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변증했습니다.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내 속에는 불의가 없다, 내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공의롭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드러내놓고 외쳤습니다(v.16-24).

이 정도 되면 누군가 나서서 예수를 제지할 법도 합니다.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당국자들이 의결했기 때문에 누군가 나서서 제지할 법도 한데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도 분명하고, 성전에서 가르치는 자가 예수인 것도 분명한데 제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기이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일어나 당국자들에게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왜 아무도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 거요? 혹시 당신들도 이 사람을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것이오?’라고 불만 섞인 항의를 했습니다(v.26). 그리고 확신에 참 음성으로 외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했소.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를 우리가 다 아오. 그는 나사렛 출신이오. 그러니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게 분명하오.’(v.27).

이 외침을 들은 예수님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말했습니다. ‘그렇다. 너희는 나를 알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데서 오지 않았다. 또 나 스스로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니다. 나는 보냄을 받았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나 나는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분이 나를 보냈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안다.’(v.28-29).

이 말은 실로 엄청난 도발입니다. 유대인의 자긍심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심각한 도발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의 최대 자긍심이 뭡니까?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야말로 유대인의 최대 자긍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은 너희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뿌리를 뒤흔들고, 유대사회의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겁니다. 자기들이 혹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겁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비롯해서 갖가지 고난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지만 이렇게까지 원색적으로 유대인의 자긍심을 짓밟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겁니다. 그리고 분노가 끓어올랐을 겁니다. 동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예수의 도발에 분노가 끓어올랐을 겁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붙잡으려 했습니다. 저 놈은 동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자라며 붙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붙잡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붙잡혀야 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v.30).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자들은 대부분 유능하고 똑똑하고 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과 진리를 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 힘깨나 쓰는 권세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근거하여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율법에도 비추어 보고, 전통에도 비추어 보고, 사람들의 기대에도 비추어 보면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단정했습니다. 무작정 거부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어서 예수를 믿지 않고 거부한 거였습니다. 예수가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빼고 나면 예수의 말이나 행동에서 그리스도라고 할 만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기에 거부한 거였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나는 위로부터 났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빛이다. 나는 온 세상을 창조한 말씀’이라고 변증하면 할수록 더더욱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하는 메시아이기는커녕 이스라엘을 혼란케 하는 자, 하나님을 사칭하는 신성모독 자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당당하게 예수를 박해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예수를 정죄했습니다.

 

결국 저들이 예수를 거부한 것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자기들이 아는 지식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지켜오고 있는 종교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자기들이 아는 지식의 범주, 자기들이 지켜오고 있는 종교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은 것이고 죽이려 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들의 지식이 예수를 믿지 못하게 가로막았습니다. 저들의 지식이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예, 지식이 문제였습니다. 자기 지식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보지 못했고, 자기 지식에 갇혀서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했고, 자기 지식의 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지식의 실용성과 유용성에 대해서만 주목했지 지식의 어리석음과 폭력성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식은 매우 유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없이 어리석고 폭력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일찍이 지식의 어리석음과 폭력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로 시끄러울 때 지식과 관련해서 기막힌 말을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고전8:1-2).

여기서 바울은 지식의 위험성이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교만은 가장 치명적인 인격적인 죄악인데, 지식이 바로 교만이라는 죄악을 부릅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지식이 있는 자는 예외 없이 교만합니다. 인문지식이든, 과학지식이든, 전문지식이든, 교양이든 좌우지간 지식이 있는 자가 거의 언제나 교만이라는 덫에 걸립니다.

지식의 위험성은 또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사람의 앎이란 결코 온전치 않습니다. 잘못된 앎도 많고, 올바른 앎이라 해도 부분적인 앎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많이 안다 해도 사람의 앎이란 끝없는 백사장의 모래 알 하나에 불과하고, 태평양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아는 게 없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눈곱만큼 압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칼 바르트도 그렇고, 20세기 최고의 천재라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는 게 없다고 할 만큼 눈곱만큼 압니다. 세계의 모든 지식을 다 쌓아놔도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는 것이지, 마땅히 알 것을 말면 감히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기는커녕 무엇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앎의 오묘함입니다. 앎의 역설입니다.

앎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앎은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많이 알고 깊이 안다 해도 결국은 부분적인 앎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잘못된 앎도 무척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것 중에 90% 이상이 잘못된 앎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앎의 진실이고, 앎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이 진실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살아오면서 발견한 최대의 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고작해야 부분적인 앎  피상적인 앎  왜곡된 앎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가 발견한 최대의 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진실을 외면한 채 삽니다. 내가 아는 것이 심히 부족한 앎이라는 엄정한 진실을 망각한 채 삽니다.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자기 지식에 취해 살고, 자기 지식에 갇혀 삽니다. 지식의 칼로 세상을 헤집고, 사람들을 찌르며 삽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자기들의 앎이 부분적인 앎이라는 것, 피상적인 앎이라는 것, 왜곡된 앎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 지식에 취해 살고, 자기 지식에 갇혀 살았습니다. 자기 지식에 취해서 자기들의 하나님 인식과 율법 이해가 정확무오하다고 확신했고, 자기 지식에 갇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지식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한 겁니다.

예수님은 지식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저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해줬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모른다. 나는 내 아버지를 아는데 너희는 내 아버지를 모른다.’(v.28-29)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물론 저들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라고 펄쩍 뛰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대로 저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저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은 예수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아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하나님이었으나, 예수가 아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들이 아는 하나님은 인간이 될 수 없는 하나님이었으나, 예수가 아는 하나님은 인간이 되시고 인간과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들이 아는 하나님은 하늘 위에 홀로 계신 하나님이었으나, 예수가 아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들이 아는 하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어야 하는 하나님이었으나, 예수가 아는 하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아는 하나님과 예수가 아는 하나님은 너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물론 저들의 하나님 인식이 완전히 잘못됐다, 완전히 거짓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온전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저들의 하나님 인식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부분적이었습니다. 이리저리 뒤틀리고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만일 이 사실을 알았다면 - 자기들의 하나님 인식이 피상적이고, 부분적이고, 이리저리 뒤틀리고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 섣불리 예수님을 정죄하거나 죽이려 들지 않았을 텐데,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 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똑같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교회 일에 관여하고 교회를 운영하는데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데 앞장서지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아는데, 이미 확고부동한데 왜 듣겠습니까. 듣지 않습니다. 이천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처럼 지금 그리스도인들도 듣지 않습니다. 이천년 전에 하나님을 안다고 확신했던 자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 앞에 오셔서 말씀하시면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예수를 죽이자고 분기탱천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지금의 개독교가 된 것도 다른 자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고, 성경을 안다고 확신하는 자들에 의해서 지금의 개독교가 됐습니다. 자기의 앎이 부분적인 앎  피상적인 앎  왜곡된 앎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왜곡됐고, 예수님이 왜곡됐고, 성경이 왜곡됐습니다. 제가 한국교회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부분적인 앎  피상적인 앎  왜곡된 앎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목사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보면 하나 같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고 성경을 안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안다고 확신했던 것처럼 한국교회 목사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고 성경을 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고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기 앎에 대한 확신이 무섭도록 강고합니다. 교회는 이런 자들을 믿음이 좋다고 칭찬합니다. 믿음이 좋은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섭도록 강고한 이 확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 확신이야말로 한국교회를 개독교로 만든 근본 원인입니다.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최대 병폐가 뭔 줄 아십니까?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심히 부족한 앎이라는 것, 기껏해야 부분적인 앎  피상적인 앎  왜곡된 앎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폐입니다. 쥐꼬리만큼 아는 데 그 아는 것에 갇혀 살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 아는 것이 전부인 줄 착각하는 것이고, 자기 아는 것이 전부인 줄 착각하기 때문에 온갖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것이고,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어요. 자기가 아는 쥐꼬리만 한 앎에 취하고 갇히게 되면 편견과 아집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고집불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옹졸하기 그지없는 좀생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아는 쥐꼬리만 한 앎의 범주 안에 하나님을 구겨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매우 유능하고 똑똑하고 힘 있는 자들이었고, 율법과 진리를 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었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기 앎의 울타리를 높이 치고 그 안에 갇힌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아는 쥐꼬리만 한 앎의 범주 속에 하나님을 구겨 넣었습니다. 앎의 주인이신 하나님, 온갖 지혜와 명철에 부요하신 하나님을 자기들이 아는 쥐꼬리만 한 앎의 범주 속에 구겨 넣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아는 일에 힘쓰되, 아는 것에 갇히지 마십시오. 아는 것에 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앎이 지극히 부분적인 앎이요, 피상적인 앎이요, 왜곡된 앎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아낌없이 앎의 울타리를 걷어내십시오. 그래야 앎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앎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야만 자기 앎이 지극히 부분적인 앎이요, 피상적인 앎이요, 왜곡된 앎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자기가 아는 쥐꼬리만 한 앎에 취하고 갇히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우매하고 절망적인 일은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일이 없고, 내가 아는 것은 일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