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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30-누구의 영광을 구하느냐

2016.07.17 18:04

정병선 조회 수:312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7:1-18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717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717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hGF9Ql12OGU

(MP3 듣기: 2016년 7월17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hGF9Ql12OGU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매우 고독하셨습니다. 아마 아담 이래로 전 인류 가운데 가장 고독하게 산 자가 예수님일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온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분입니다. 그런 분이 땅에서 난 사람들 속에서 살자니 얼마나 오해와 갈등이 많았겠습니까. 말씀이신 분이 율법의 껍데기만 붙잡고 사는 사람들 속에서 살자니 얼마나 오해와 정죄를 많이 받았겠습니까. 저들은 기적은 좋아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치관은 좋아하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기는커녕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박해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요5:16,18). 그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 유대 땅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사실대로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죽이려 했기 때문에 유대 땅으로 가지 않았다고(7:1). 죽음이 두려웠던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직은 죽음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과의 대화에서 그 진실이 드러납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가라, 당신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등을 떼밀었습니다(7:3-4). 그 때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고 말하며 거부했습니다(7:6). 여기서 ‘내 때’란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고 승천할 때를 가리킵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구원의 때인 카이로스(kairos)의 때를 가리킵니다[크로노스(chronos)는 연대기적 시간]. 그러니까 지금은 자기가 죽을 카이로스의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때나 죽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무지에 짓밟혀 죽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미움과 분노에 떼밀려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죽음을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유대 땅으로 가지 않은 것입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의 이 깊은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로 가라고, 유대로 가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부추겼습니다.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 같은 사람이 이렇게 촌구석에 처박혀 지내면 안 된다. 이제 곧 명절 큰 날이 다가오니 예루살렘에 가서 당신을 드러내라’고 부추겼습니다. 여러분, 형제간의 우애가 굉장히 깊은 것 같지요? 예수님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사실은 사탄을 쏙 빼닮은 행동을 한 겁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할 때 사탄이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여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라고도 유혹했지만, 천하만국을 차지하라고도 유혹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군천사들의 보호를 받는 능력을 과시하라고도 유혹했습니다(마4:1-11). 다시 말하면 능력을 보여주고, 사람을 얻고, 세상을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출세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도 같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사람을 얻고, 세상을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출세하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과 물고기로 배부른 자들도 똑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밀어줄 테니 세상을 차지하라고 부추겼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사람을 얻고, 세상을 차지하라고 부추겼습니다. 사실 굉장히 멋진 기획 아닙니까? 꿈이 있는 자라면 한 번쯤 시도해볼만한 도전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멋진 제안들을 다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맘만 먹으면 충분히 세상을 차지할 수 있는데 왜 거부했을까요?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사탄적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차지하는 방식은 결코 하나님 아버지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의 부추김이 사탄의 유혹과 똑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깊은 진실 하나를 말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으나 나는 미워한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7:7).

예, 100%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박수치지 않았습니다. 잘 한다고, 애쓴다고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했습니다. 세상의 겉모습 뒤에 감춰진 악을 폭로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올 만큼,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질 만큼, 세상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줄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박수치지 않았습니다. 잘 한다고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애쓴다고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못 본체 하거나 감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겉모습 뒤에 감춰진 악을 폭로했습니다. 율법에 갇혀 율법을 범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악을 증언했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직설했습니다.

 

그렇다고 정죄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악을 악이라고 증언하는 것과 정죄하는 것이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정죄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증언’과 ‘정죄’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증언은 죄 자체에 주목하고, 정죄는 죄인에 주목합니다. 증언은 사랑의 행위이고, 정죄는 미움의 행위입니다. 증언은 구원으로 이끄는 포용이고, 정죄는 멸망으로 내쫒는 배제입니다. 증언과 정죄는 이처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죄인을 멀리하고 배제했습니다. 죄인을 정죄함으로써 자기들의 의를 확인했고, 죄인을 배제함으로써 저들을 어둠에 파묻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짓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면서도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기를 기뻐했습니다. 죄인들을 어둠에 파묻지 않고 빛 가운데로 나오라고 쉼 없이 불렀습니다. 귀신의 올무에서 해방시키고, 악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시켰습니다.

바리새인은 죄인을 정죄했지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했지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 오셨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했을 것 같습니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세상을 차지하기를 원하는 자는 절대로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희망을 심어주고, 이곳저곳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한 것은 세상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정말 구원하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개과천선을 하려면 반드시 자기 허물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 허물이 얼마나 큰지를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개관천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빛 가운데로 나오려면 반드시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절대로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사람이 죄의 종노릇 하는 것에서 해방되려면 반드시 자기가 죄의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 삶 전체가 죄의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처절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절대로 죄의 종노릇하는 것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평생 자기 의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정죄하며 살았습니다. 율법에 갇혀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자기 의에 사로잡혀 산 것이고, 사람들을 정죄하며 산 것입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평생 율법에 갇혀 산 것입니다. 정말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본 사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죄로 가득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감히 자기 의에 사로잡힐 수 없고, 사람들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길 뿐. 입을 닫고 기도할 뿐.

예수님께서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폭로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봐야만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구원받을 수 있고, 어둠을 어둠이라고 자각해야만 어둠의 소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에요. 너는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으면서, 너는 죄인이라고 말해주고, 죄인의 손을 붙잡아주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사랑을 실행했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오묘합니다. 보통의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아니, 보통의 상식이나 예상과는 어긋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곧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감싸고 위로하고 격려하실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예상을 완전히 깨부쉈습니다. 세상을 감싸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는커녕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폭로했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라고 소리쳤습니다(마23:3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진노했습니다(마23:13).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는 곧바로 또 다른 예상을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인정사정없이 내치고, 정죄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완고한 원칙주의자일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예상까지도 깨부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죄인을 기쁘게 용서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목숨을 지켜줬습니다. 죄인을 어둠속에 내치지 않고 빛 가운데로 불러냈습니다.

참 오묘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으면서도 세상의 어둠과 악을 폭로하셨고, 세상의 어둠과 악을 폭로하시면서도 어둠에 빛을 비추셨고, 죄인을 가까이 하시며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죄의 종노릇 하는 자들을 조롱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악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웠으면서도 사람들과 싸우거나 경쟁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을 향해 욕바가지를 퍼붓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분노를 퍼부었으면서도 미워하거나 내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배신을 당했으면서도 끝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이처럼 놀랍고 오묘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말 절묘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보통 옳으면 아름답기가 어렵고, 아름다우면 옳기가 어려운데, 예수님은 옳으면서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옳은 길을 절묘하게 갔습니다. 참 대단한 실력입니다.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함입니다.

 

여러분, 누구와 경쟁하는 예수님, 누구와 싸우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림이 그려지나요? 아마 잘 안 그려질 겁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삶 어느 한 자락에도 싸움과 경쟁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이 잘 안 그려질 겁니다. ‘경쟁하는 예수’, 이 표현은 100% 모순된 표현입니다. ‘경쟁하는 그리스도인’, 이 표현도 똑같이 100% 모순된 표현이어야 합니다. 도무지 성립되지 않는 모순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쟁 속에서 경쟁하며 삽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과 경쟁하고, 다른 종교와 경쟁합니다. 심지어 교회끼리도 경쟁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경쟁하거나 싸우지 않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 걸고 경쟁합니다. 헌신이라고 말하고, 충성이라고 말하고, 순교라고 말하면서 경쟁, 경쟁, 경쟁에 박차를 가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보다 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경쟁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겠습니까?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경쟁은, 그 앞에 어떤 미사여구를 붙인다 해도, 결국 세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사탄의 속성이고 죄의 속성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좀 더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형제들만 예루살렘으로 보낸 후 갈릴리에 남았다가 혼자서 은밀하게 명절 중간쯤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가르쳤습니다. 보통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랍비에게 배워야 하는데 예수님은 이런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나사렛 촌놈 출신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르침은 어떤 랍비의 가르침과도 달랐습니다. 학식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또 하나의 진실을 말씀했습니다.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7:16).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7:18).

무슨 말입니까? 내 가르침은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취득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께 들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꼼짝 못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영광만 구하기 때문에 내 속에 불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매우 정확한 말씀입니다. 누구의 영광을 구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느냐에 따라 의와 불의가 결정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되면 뭘 하든지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변호사를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선교를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게 되면 변호사를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선교를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의를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선교는 의의 일이고, 장사는 불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의 영광을 구하느냐에 따라 의와 불의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 구했습니다.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영광만 구했기 때문에 세상을 차지하는데 삶의 목표를 두지 않았고, 세상을 차지하는데 삶의 목표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했다면 어땠을까요? 자기 영광을 구했다면 세상을 차지하는데 삶의 목표를 두었을 것이고, 세상을 차지하는데 삶의 목표를 두었으면 절대로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의이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불의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뒤틀립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잘났든 못났든 좌우지간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불의합니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죄인이고, 체질상 죄인입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자백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얼마나 뒤틀리겠습니까. 세상일들이 얼마나 악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고 증언한 것은 거짓도 아니고 비난도 아닙니다. 너무도 자명한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도 자명한 이 진실을 증언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진실을 폭로했습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하고 싶어서, 악의 종노릇하는 삶에서 구원하고 싶어서 진실을 증언했습니다. 이 진실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이 진실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진실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세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온 세상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떨어야 할 이유가 사실은 없습니다. 온 세상은 그저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온 생명 또한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선물이요 은총인 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우리가 이 진실에 눈을 뜨면 세상의 악함에 종노릇하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아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