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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6:41-59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619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619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US8tgGM-cgA

(MP3 듣기: 2016년 6월19일 주일예배설교)

https://www.youtube.com/watch?v=US8tgGM-cgA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명의 떡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갈릴리에 사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걸 알거든요. 이들은 요셉과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들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성실한 목수인지도 잘 알고, 그의 부인 마리아도 잘 아는 자들입니다. 개중에는 예수가 성장해온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자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에게는 특별한 이력이 없습니다. 예수는 그저 갈릴리의 변방인 나사렛에서 여느 유대인들처럼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목수 일을 함께 하면서 청년으로 장성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 살쯤 되면서부터 갑자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설파하기 시작했고, 병자들을 고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등 놀라운 이적을 행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갈릴리 사람들 눈에는 예수는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니 얼마나 어이가 없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어! 이건 또 뭐지?’라는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알을 돌렸을 겁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오? 당신의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거요?’라고 군중을 향한 것인지 예수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여기서 말의 핵심은 ‘우리가 안다’는데 있습니다. ‘당신의 부모를 우리가 아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왔다느니, 생명의 떡이라느니 그런 허튼 소리를 하지 마시오.’라는 말입니다. 일단은 맞는 말입니다. 저들은 예수를 알았습니다. 예수가 누구의 아들인지, 언제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예수를 알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저들이 예수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시다가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한 후 갈릴리로 가실 때 한 마디를 툭 던진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던진 말이 이겁니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v.44). 여러분, 선지자는 왜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 고향 사람들이 선지자를 인간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언제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를 선지자로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예수가 누구의 아들인지, 언제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 키와 몸무게가 얼마인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뭘 잘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인간 예수의 면면을 소상히 알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더 깊은 진실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자고로 아는 것이 앎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사람이 뭘 안다고 생각하면,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새롭게 알 수 없습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한 새로운 앎에 들어가지 못해요. 안다고 생각하는 한 더 깊은 앎, 더 풍성한 앎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의 무지를 폭로하려고 애쓴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한 제대로 배울 수 없고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알게 하려고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사람들의 무지를 폭로하려고 애쓴 것입니다. 무지를 폭로하려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또 물은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에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앎에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예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 또한 율법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알기 때문에 성경이 뭘 말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를 새롭게 알아가지 않고, 예수를 새롭게 알아가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깊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10년을 믿고, 20년을 믿고, 50년을 믿어도 예수를 깊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예수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안다, 구원을 안다, 믿음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0년을 믿고, 20년을 믿고, 50년을 믿어도 항상 그 타령인 겁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예수를 안다, 구원을 안다, 믿음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설교가 그 나물에 그 밥인 겁니다.

 

사실입니다.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예수의 부모를 알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하자 그런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반박을 듣고 더더욱 알아듣기 힘든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v44).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당신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끌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일까요? 아니면, 말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알고 믿을 수 없다는 말일까요? 첫 번째 해석보다는 두 번째 해석이 좀 낫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요한복음이 쉬지 않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면 두 가지 심각한 오해와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야 예수께 나올 수 있으니까, 우리가 노력할 건 없구나,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하나님이 이끌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구나, 그러고는 믿어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자기가 믿지 않는 까닭을 하나님이 이끌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 돌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적잖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은 예수 믿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니 인간의 노력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v.45)고 말했습니다. 내게 오기 위해서는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나를 믿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는 일은 세계 내적이지 않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어떻게 보았습니까? 세계 내적인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한쪽에서는 예수가 행하는 이적을 보고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고, 한쪽에서는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보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거부했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를 인간적인 차원, 세계 내적인 차원에서 보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시각을 부정하신 겁니다. 너희들처럼 인간의 차원이나 세계 내적인 차원에서 보아서는 나를 볼 수 없다, 인간의 눈 세상의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 - 정치, 과학, 기술, 예술, 행정, 기업, 교육, 철학, 스포츠 - 은 세계 내적입니다. 인간의 재능과 노력, 인간관계나 여러 배경 등이 작용해서 성과를 만들어냅니다. 운이라는 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심은 만큼 거둡니다. 투입한 만큼 얻습니다. 수소 분자 두 개와 산소 분자 하나가 뭉치면 물이 되고,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생명이 잉태되고, 브레이크 댄스를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하면 실력이 늘고, 책을 많이 읽으면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이 발전하고, 좋은 선생님께 배우면 실력이 늡니다. 이것이 세상일의 기본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고 믿는 일은 그런 시스템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열심히 투입했더니 예수를 알고 믿게 되는 결실이 맺히더라,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를 알고 믿는 것은 오직 하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결하면 좀 더 분명해집니다. 갈릴리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알았습니다. 예수의 부모도 알았고, 예수의 형제와 집도 알았고, 예수의 나이도 알았고, 얼굴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를 아는 것이 예수를 믿는 일에 도움이 되었나요? 오히려 걸림돌이 됐습니다. 인간 예수를 아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나를 인간적으로 알고 세상적으로 아는 것으로는 나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세상의 자산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결실이 맺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의 진정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하고 나서 다시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살아있는 떡’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v.48-51). 그리고는 내가 줄 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살’이 곧 내가 줄 떡이라고 말씀했습니다(v.51).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v.53-55)라고 점점 원색적으로 강렬하게(점층법) 말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자기 살과 피를 먹게 한단 말이냐, 더욱이 여호와께서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레7:6-27)고 말씀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서로 다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한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v.56-57). 이 말씀은 가히 화룡점정이라 할 만한 말씀입니다. 이 한 마디 말씀에 신구약 전체 이야기가 녹아있습니다. 이 한 마디 말씀에 믿음이 본질이 녹아있고, 구원의 본질이 녹아있고, 영생의 본질이 녹아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 녹아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게 뭡니까?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죽음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뭡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안에 살고 내가 예수 안에 사는 것, 즉 예수와 내가 동고동락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아버지와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맡긴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온전히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깊이 연대했을 뿐만 아니라 신비한 연합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바로 이 삶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삶을 살라고 구원받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합니다. 그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하지만 아직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과 간격이 있습니다. 고통도 겪고, 상처도 겪고, 이별도 겪고, 실패도 겪으며 살아갑니다. 서로 싸우고 미워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는 종말의 날에는 이런 것에서 해방되어 온전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살았던 바로 그 삶, 온전히 하나 된 삶, 사랑과 신뢰로 충만한 그 삶을 우리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와 살았던 바로 그 삶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게 아니고, 아들이 아버지와 살았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는 세상의 삶, 종말에 완성되는 삶이 영생입니다. 아들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사시는 그 삶이 영생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일체로 사시는 그 삶이 영생입니다. 더 짧게 줄이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영생을 주기 위해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예수를 먹는 그 사람도 예수로 말미암아 살게 하려고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지극한 사랑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이요 복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을 일컬어 “이 같이 큰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달리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이 같이 큰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이 이 같이 큰데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떻게 그 보응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경고성 질문을 했습니다(2:3). 진실로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고 깊고 오묘하고 풍성합니다.

심위일체를 깊이 공부하는 신학자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는 복음의 심히 큼을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오직 회심의 순간에만 잠깐 역사하고 삶의 모든 순간까지 확장되지 않는 복음은 지나치게 작은 복음이다. 당신의 죄악을 용서받게 해주지만 삶의 변혁을 일으키는 능력을 제공해주지 않는 복음은 지나치게 작은 복음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받는 혜택 가운데 하나에 사로잡혀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는 복음은 지나치게 작은 복음이다. 당신의 도덕적 행위나 사회적 양심이나 종교적 경험에 의해 측량되는 복음은 지나치게 작은 복음이다. 당신의 삶의 구성하는 요소들을 재배열해주지만 당신을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집어넣지 않는 복음은 지나치게 작은 복음이다.’(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149쪽).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작은 복음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처럼 작은 구원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고 깊고 오묘하고 풍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