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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5:27-47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605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605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rFqXBomzz-I

(MP3 듣기: 2016년 6월05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rFqXBomzz-I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증언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는 것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v.21), 내 말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v.25), 아버지께서 나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v.27)고 증언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을 자기가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외에도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은 다른 누구의 주장보다도 과격하고 근본적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자기는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구원자요 심판자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자기 뜻대로 심판하지 않고 듣는 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심판한다고 했습니다만(v.30) 어쨌든 자기는 심판의 주체이고, 자기가 행하는 심판은 의롭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읍시다. 예수님이 행하는 구원은 뭐며 심판은 뭘까요?

구원은 사단의 종살이에서 건져내는 것이고, 죽음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내신 것처럼 사단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내는 것이 구원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이집트 전역에 임한 죽음의 재앙에서 건짐 받은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써 죽음의 재앙에서 건짐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것처럼 약속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상속자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심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와 같은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바로와 그의 백성들이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음으로써 이집트 전역에 임한 죽음의 재앙을 피하지 못한 것처럼 참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써 온 세상에 임한 죽음의 권세 아래 사는 것이 심판이고, 이집트의 군사들이 죽음의 바다인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빠져 죽은 것처럼 지식 ‧ 도덕 ‧ 종교 ‧ 정치 ‧ 돈 ‧ 명예 ‧ 인기로써 죽음의 바다를 건너려다가 빠져죽는 것이 심판입니다.

달리 말하지요.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분리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요 심판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섞여 살았는데 섞여 살았던 그들을 분리하는 것이 곧 구원이요 심판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분리하는 것 자체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구원의 행위가 따로 있고 심판의 행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롯이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행위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이고, 이집트 입장에서 보면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구원의 뒷면이 심판이고, 심판의 뒷면이 구원입니다. 심판은 흔히 생각하듯이 죄인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포하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죽음은 에덴동산에서 이미 선포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이미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는 영원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냄으로써 심판은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살아갑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산다 해도, 아무리 부귀영화를 다 누린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산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최고의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전1:2)고 탄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살 수밖에 없고, 죽음의 권세 아래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고 탄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심판 아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 것도 사실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뒤섞여 있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공존이 끝날 때가 올 것입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공존했지만 때가 되매 분리된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지금은 공존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완전히 분리될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종말입니다. 구원과 심판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종말론적 구원이고 종말론적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 일을 행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종말론적 구원을 완성하고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는 주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이야기입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을 한다고 주장하는 실로 엄청난 말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유대인들이 의아해했습니다.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가면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근거해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다.”(요8:13)고 이의를 제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도 아마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에는 증언에 관한 율법이 있었거든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죽일 수 있다(신17:6), 어떤 사건을 죄악된 것으로 확정할 때에도 한 사람의 증인만으로는 안 되고 두 세 증인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율법이 있었습니다(신19:15). 예수님도 이 율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근거해 대답했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v.31-32).

 

그리고는 증인들을 죽 나열했습니다.

첫째로 세례 요한입니다(v.3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증언했습니다(요1:15). 저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1:29), 성령으로 세례 베푸는 자다(1:33), 하나님의 아들이시다(1:34)고 증언했습니다.

둘째로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를 내놓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한다고 말했습니다(v.36). 즉 38년 병자를 고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들이 다 그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셋째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신다고 말했습니다(v.37). 사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세례 받으실 때 친히 임하시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언했습니다(마3:17). 예수님이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랐을 때에도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게 되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언했습니다(마17:5). 예수님은 아버지의 증언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경이 곧 아버지의 증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인데(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음) 구약의 모든 저자들이 증언하는 것이 사실은 자기라고 말합니다(v.39). 예수님은 이렇게 세 가지 증언들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증언이 참되다고 강변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증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요 심판자라는 증언만큼 확실한 증언은 없습니다. 세종대왕에 대한 증언보다도, 이순신 장군에 대한 증언보다도, 소크라테스에 대한 증언보다도, 알렉산더에 대한 증언보다도, 나폴레옹에 대한 증언보다도, 칼 마르크스에 대한 증언보다도, 석가에 대한 증언보다도 예수에 대한 증언이 몇 천 배 몇 만 배 더 많고 깊습니다.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따져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넓고 명확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온 피조물까지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롬8:19). 히브리서 저자도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히12:1-2).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언, 예수가 구원자요 심판자라는 증언은 예수 혼자만의 증언이 아닙니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는 증언입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증인을 확보한 최고의 증언입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증언입니다. 도무지 믿지 않을 수 없는 증언입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증언을 믿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저들은 성경에 관한한 정통한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달달 외울 만큼 박식한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실제로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았고, 그래서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를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기는커녕 박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왜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은 걸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가 두 가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v.42), 둘째는 사람들이 자기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v.44)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대강령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 해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 돈입니다. 바울이 말했어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2). 또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하고, 자기 이름이 유명해지기를 원하고, 영원히 깨지지 않을 신기록 세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이러함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훤히 아십니다. 사람은 오직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꿰뚫어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기대지 않았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기대지 않았습니다(요2:23-25).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자기를 의탁하지도 않았고, 사람에게 조금도 기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죄인이라서 오히려 사랑하셨습니다(막2:17). 건강해서가 아니라 병든 자라서 오히려 사랑하셨습니다(마9:12). 예수님을 환영해서가 아니라 외면하고 박해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고, 미움과 조롱을 받아가면서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니,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자, 이정도 되면 믿을만하지 않습니까? 온 세상 사람은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예수는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의 행위와 증언은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온갖 구실을 만들어 믿지 않습니다. 예수가 훌륭하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렇다고 예수를 믿고 예배할 것까지는 없다,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는다느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느니,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다느니 하는 것은 과거의 신화적 세계관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을 사실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것도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인생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다, 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정말 믿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고, 믿지 않아야 하는 뱀의 말은 그리도 쉽게 믿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죽은 예수, 우리의 허물을 품고 끝까지 사랑한 예수의 증언은 믿지 않으면서 일확천금을 얻는다는 사기꾼의 말이나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점쟁이의 말에는 혹하고 넘어갑니다. 말도 안 되는 걸 지껄이는 부흥사의 말, 증권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찌라시, 근거 없는 소문,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무한 긍정의 힘은 쉽게 믿습니다.

 

참 기이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으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에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실로 엄청난 반역이고 배신입니다. 엄청난 자기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줄기차게 사랑하셨습니다. 끝없이 반역과 배신을 일삼는 사람, 헛된 우상은 기막히게 경배하면서도 하나님에게는 등을 돌리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창조자께서 피조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제발 내 사랑을 믿어달라고, 내 사랑을 믿어달라고 그러셨습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으로 너희를 품고 싶으니 제발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냉담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에 영혼을 팔고, 마음을 기울이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눈곱만한 이권에 영혼을 팔고, 걸레 같은 의에 마음을 기울이고, 순간의 영광에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거짓 사랑에 영혼을 팔고, 잠깐 피었다가 지는 육체적 생명에 몰입합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한없이 똑똑하고 창조적이면서도 한없이 어리석고 우매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아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이면서도 한없이 누추하고 부패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여, 묻습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예수의 증언을 믿으십니까? 십자가에서 확증된 예수(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니까? 부활로 확증된 예수(하나님)의 생명을 믿으십니까? 이 사랑을 믿으십시오. 오직 이 사랑을 신뢰하고 또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이 생명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만이 사랑이시고, 하나님만이 생명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