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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4:10-19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410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410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cyL1brPuo30

(MP3 듣기: 2016년 4월10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cyL1brPuo30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태양을 비추시고,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라고.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의 아들답게 경계 없이 경계를 가로질러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천년에 걸쳐 형성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경계, 그 질기고도 강고한 경계를 가로질러 사마리아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단지 목말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을 참으로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여인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보는 순간 꿰뚫어 아셨거든요. 그 여인이 심히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서 깊은 고독과 외로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있다는 것을, 사회적인 토대는 물론이고 내적인 토대마저 무너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그 여인이야말로 진짜 목마른 사람이요 생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을 진실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다가가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건넨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사마리아인을 상종도 하지 않는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에 나타난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사마리아 여자인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한 것에 더 놀랐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정네가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또 당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안다면 당신이 나에게 물을 대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지금 나를 유대인 남자로 생각하는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유대인 남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물 한 잔 대접하고 떠나보낼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엎드려 구해야 할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유대인이지만 유대에 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유대인’이라는 문화적 범주와 역사적 한계에 갇힌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아는 것은 껍데기만 아는 것이지 속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에게 속한 분으로 알아야 진짜로 아는 것이고, 야곱의 우물 물을 대접받아야 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living water)를 베푸는 분으로 알아야 진짜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진짜 자기를 알기 원했습니다. 껍데기 예수가 아니라 속 알맹이 예수를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혼란스럽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슴에 꽂히는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생수를 네게 줄 것’이라는 말이 여인의 가슴에 확 꽂혔습니다. 그래서 돌아서지 않고 또 물었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v.11-12).

이 질문은 여인이 던질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우물은 2천년 동안이나 물이 마르지 않은 우물이었거든요. 세겜 사람들은 물론이고 짐승들까지도 먹여 살린 최고의 우물이었거든요. 이 우물보다 더 깊고 좋은 우물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의 우물이야말로 최고의 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냐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v.13-14).

정말 핵심을 찌르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인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여인이 아는 대로 이 우물은 이천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은 우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아무리 마셔도 다시 목마르는 물이라고 말합니다. 이천년 동안이나 물이 마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내가 주는 물은 이 우물물과 다르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다.’라고 실로 경천동지할 말씀을 했습니다.

옳습니다. 야곱의 우물이 주는 물과 예수가 주는 물은 완전히 다릅니다. 야곱의 우물이 주는 물은 먹어도 먹어도 또다시 목이 마르는 물인 반면, 예수가 주는 물은 두 번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야곱의 우물이 주는 물은 밖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오는 물인 반면, 예수가 주는 물은 사람 안에서 솟구치는 물입니다. 야곱의 우물이 주는 물은 땅에서 솟구치는 물인 반면, 예수가 주는 물은 하나님의 품에서 솟구치는 물입니다. 이렇게 두 물은 완전히 다릅니다. 근원이 다르고 본질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며 대화를 시도한 것도 사실은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곱의 우물이 주는 물은 진정한 의미의 생명의 젖줄이 아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 물이 전부인 줄 알고 이 물을 먹었고, 지나온 이천년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물을 먹고 살았지만 이 물은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생명의 젖줄이 아니다, 오직 내가 주는 물이 진짜 생명의 젖줄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어야만 생명이 춤을 추고 활력을 얻는다, 두 번 다시 목마르지 않게 된다,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물 좀 달라’고 말을 건넨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이 말을 듣자말자 곧바로 엎드려 구했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v.15). 그렇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자기가 지금까지 찾은 것이 바로 그 물이라는 것을 즉각 인지했습니다.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물이라는 것, 먹어도 먹어도 또다시 목마르는 물이 아니라 두 번 다시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즉각 인지했습니다.

물론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예수가 주겠다는 물이 어떤 물인지를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주겠다는 물이 어떤 물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아직은 모든 게 불투명합니다. 알듯 말듯 희미하기만 하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습니다. 그 물이 어떤 물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물이 있다면 ‘바로 그 물’을 마시고 싶다, 다른 물 말고 ‘당신이 말한 그 물’을 마시고 싶다, 하는 것만큼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엎드려 구한 것입니다. ‘그런 물을 내게 주십시오. 내게 주어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주십시오. 다시는 야곱의 우물에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직은 그 물이 어떤 물인지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당신이 말한 그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라고 손을 내민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물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은 새까맣게 잊고 ‘그런 물을 달라’고 간절히 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갑자기 화제를 바꿔 말했습니다. 여인이 구하는 물은 주지 않고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여인은 속으로 섬찟 놀랐을 것입니다. 화제가 갑자기 바뀐 것 때문에도 놀랐겠지만 자신의 깊은 상처와 수치를 건드린 것 때문에 더 놀랐을 것입니다. 사실 이 여인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었거든요. 속속들이 말할 수는 없지만 다섯 남자에게 버림 받은 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여인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라고 거듭 거듭 말씀하시는 것도 그래서입니다(신24:19-21, 27:19, 사1:17). 고아와 과부가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다섯 남자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상처가 아니었을 게 분명합니다. 더욱이 지금 동거하고 있는 여섯 번째 남자도 남편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해주고 돌보는 남편이 아니고 자기를 성적 대상으로 갈취하는 불한당일 뿐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진실로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롭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약자 중의 약자였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한다는 것은 가장 치욕스럽고 아픈 상처를 후벼 파는 일과 같습니다. 마치 강간을 당한 여성에게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경찰이 꼬치꼬치 캐묻는 것과 같습니다. 더욱이 낮선 남자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황당하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고, 엽기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정나미가 떨어지기도 하고, 뭐 오만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침착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아주 짤막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 속에는 여인의 아픈 과거가 다 녹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여인의 깊은 상처를 후벼 팠을까요? 그 여인으로 하여금 ‘나는 남편이 없다’는 수치스러운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여인의 현실 인식을 극단적으로까지 밀어붙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인이 지금까지 다섯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남편을 찾는 것으로 삶의 목마름,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처절하게 자각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그 당시에 여인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남편을 의지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남자도 자기 목마름을 해갈해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떤 놈인가를 붙잡는 것 외에는 딱히 길이 없기 때문에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만 그렇게 살까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비슷하게 삽니다. 모양은 제각각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합니다. 지금 직장이 맘에 들지 않지만, 지금 장사가 시원찮지만, 지금 날품팔이가 힘에 겹지만, 지금 공부하는 게 죽기보다 싫지만 그래도 성공하면 목마름이 해갈될 것이라고, 꿈을 이루면 목마름이 해갈될 것이라고, 좋은 남편 좋은 아내를 만나면 목마름이 해갈될 것이라고, 부자가 되면 목마름을 해갈할 것이라고, 친구를 많이 사귀고 유명해지면 목마름이 해갈될 것이라고, 권력을 쟁취하면 목마름을 해갈할 것이라고, 신을 믿으면 목마름이 해갈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참고 견디며 열심히 씨름하고 있습니다. 삶의 목마름,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를 기웃거린들 목마름이 해갈되지는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다섯 남편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무엇을 선택하든, 어디를 기웃거리든 결국 목마름을 해갈하지 못하고 버림받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끝없이 목이 마르기 때문에 야곱의 우물로 달려갑니다. 성공이라는 우물, 부자라는 우물, 권력이라는 우물, 명성이라는 우물, 꿈이라는 우물, 가정이라는 우물, 종교라는 우물로 달려가서 열심히 목을 축입니다. 그런 물로는 절대 삶의 갈증, 영혼의 갈증이 해갈되지 않는데도 그렇게라도 목을 축여야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야곱의 우물로 달려갑니다. 밖에 있는 우물, 세상에 있는 우물,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또다시 목마른 물을 찾아 달려갑니다. 그런 면에서 사마리아 여인만 남편이 없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남편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의지할 남편, 삶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남편이 없습니다. 옳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아와 과부입니다. 영적인 고아요 영적인 과부입니다. 예수님께서 “남편이 없다는 당신 말이 참되다”고 인정하신 것도 그래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나에게는 의지할 남편이 없다는 것, 나는 고아요 과부라는 것, 나는 지금 목마르다는 것, 내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것이 세상에 도무지 없다는 것, 세상에 있는 모든 우물은 먹어도 먹어도 또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고백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껍데기 예수 말고, 유대인 예수 말고 속 알맹이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났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기적같이 목마름이 해갈됐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v.28). ‘물동이를 버려두었다’는 것은 더 이상 야곱의 우물 물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삶의 목마름, 영혼의 목마름이 해갈됐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동네로 들어갔다’는 것은 외로움과 소외에서 해방됐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물 길으러 오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물 길으러 올만큼 외롭고 소외된 삶을 살았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됐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게 됐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꽉 막혔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활짝 열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물은 다시 목마르는 물인 반면 예수님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사마리아인에게도 생명의 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삶의 목마름, 영혼의 목마름을 채웠습니다. 여인의 깊은 아픔과 외로움과 소외가 완전히 치유됐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온 세상의 생명을 살리는 생수이십니다. 삶의 갈증과 영혼의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갈시켜주는 영원한 생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는 자들은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두 번 다시 목마르지 않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물론 껍데기 예수, 유대인 예수를 만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껍데기 예수, 유대인 예수 말고, 속 알맹이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만났습니까? 껍데기 예수 말고, 유대인 예수 말고, 기적을 행하는 예수 말고, 속 알맹이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