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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삼위일체적 교회인가

2016.03.20 19:48

정병선 조회 수:615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17:20-23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320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320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S7Cwug8xHWA

(MP3 듣기: 2016년 3월20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S7Cwug8xHWA

 

지난 주일 말씀샘교회는 삼위일체적 교회로의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삼위일체적 교회를 세워달라는 기도의 씨앗도 심었습니다. 오늘은 말씀샘교회가 왜 삼위일체적 교회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치고 삼위일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시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뜻은 생각지 않고 공식만 달달 외우는 것처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이시다, 라는 것 정도만 알았지 삼위일체가 말하는 바가 뭔지, 삼위일체가 이 세상과 삶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깊이 숙고하거나 탐구하지는 않았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깊이 공부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도 관심을 갖고 공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신광은 목사님의 책 [메가 처치를 넘어서]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삼위일체가 교회론의 원형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신광은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모든 교회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닮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에 관심을 갖고 조금 들여다보니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알파이자 오메가요 뿌리이자 기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시라는 걸 빼버리면 솔직히 기독교 신앙이나 회교의 신앙이나 노자의 도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할 만큼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독특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삼위일체가 말하는 최고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관계적 존재라는 것, 하나님은 단독자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고, 성자도 성자로만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고, 성령도 성령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아주 독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구별된 인격입니다. 성부가 성자가 되지도 않고, 성자가 성령이 되지도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엄연히 구별되고, 성자와 성령도 엄연히 구별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뒤섞이거나 통합되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언제나 구별된 인격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복수입니다.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성부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마3:16-17). 예수님이 세례 받던 그 시공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와 자기를 철저하게 구별했습니다(요10:15,17-18, 12:49-50).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복수로 불렀는데 ‘엘로힘’은 하나님의 탁월하심이나 장엄하심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복수로 불렀다는 사실 자체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복수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수로도 존재하십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 처음에는 ‘우리’(Our)라고 복수로 표현했지만 곧바로 ‘자기 형상’(his own image - their가 아닌 his)대로 창조했다고 단수로 말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도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단수로 말했습니다(출3:13-14). 또 아버지와 자기를 구별했던 예수님께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요14:9).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인 아주 독특한 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논리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14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은 처음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신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사람에서부터 구원과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 속에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당신의 존재적 특성을 투영하셨습니다.

우선 물리적인 세상을 봅시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는 만유인력이라는 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는 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인데 이 법칙은 이미 검증된 과학적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물체는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책상 위에 있는 연필과 지우개도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고, 책과 컴퓨터도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고, 나무와 돌도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고, 태양과 지구도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고, 별들도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고, 사람도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책상 위에 있는 연필과 지우개가 끌어당기는 힘이 미미하기 때문에 달라붙지는 않지만 어쨌든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동그란 지구 위에서 살고 있는 것도 지구가 모든 물체를 지구의 중심으로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모든 물체가 그냥 존재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궁극적인 이유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가리켜 사랑이시라고 했는데(요일1서4:8,16),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은 삼위 간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창조한 모든 물체 또한 서로를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봅시다. 모든 생명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자라고,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단독자로 태어나 단독자로 살아가는 생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생명도 없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생명도 없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께서는 “낱알 하나 속에 우주가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낱알 하나 마저도 우주만물의 협력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우주만물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의 생명은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생명은 하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왜 모든 생명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자라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걸까요? 왜 모든 생명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 또한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자라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삼위이시지만 하나이고 하나이시지만 삼위이시기 때문에 모든 생명도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들여다보면 세상 곳곳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이 투영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이 투영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작품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이 세상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이 많이 훼손되고 왜곡됐습니다. 하지만 무수한 왜곡과 뒤틀림과 역행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왜곡과 뒤틀림과 역행으로 얼룩진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특성이 온전하게 투영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창조에서부터 종말의 하나님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 속에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지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내주’, ‘상호침투’를 뜻하는 헬라어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지만 삼위 사이에 긴장이나 갈등이나 분리나 대립 같은 것은 일체 없습니다. 오직 서로를 사랑하며 상호내주 할 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이 ‘페리코레시스’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요10:38, 14:9-11)고 말씀했는데 바로 이것이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성자가 성부 안에 있고, 성부가 성자 안에 있는 것이 바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10:30)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성부와 성자가 ‘페리코레시스’의 방식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서로에게 침투하고, 서로를 포섭할 뿐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자신의 개성이나 권리나 자유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언제나 다른 위격을 향합니다. 세 위격은 서로 다른 위격을 위해, 다른 위격을 통해, 다른 위격과 함께, 다른 위격 안에 존재하십니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 사이에 구별은 있어도 긴장이나 갈등이나 분리나 대립은 없는 아주 독특한 존재방식이 바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존재양식이 제자들에게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이 기도는 성자가 성부와 ‘페리코레시스’적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삼위 하나님과 ‘페리코레시스’적 방식으로 존재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이 기도는 제자들도 피차 ‘페리코레시스’적 방식으로 존재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한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과 ‘페리코레시스’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제자들 상호간에도 ‘페리코레시스’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기도한 대로 살고 있나요? ‘페리코레시스’적 방식으로 살고 있나요?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와 교회끼리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고,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 어떤 형태의 분리나 힘의 경쟁 없이 오직 피차 사랑하고 협력하고 공존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교회 안에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종교적인 거룩함이나 심리적인 위로나 내세의 구원을 담보해주는 기관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의 현재 처소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깨어진 상태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회복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페리코레시스’적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지만 교회만큼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교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교회일 수 있습니다.

 

말씀샘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가 돼야 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페리코레시스’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교회,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닮아가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어떤 형태의 분리나 반목이나 힘의 경쟁에서도 해방되어 피차 감사하고 격려하고 높이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저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삼위일체적 교회에 대해 눈을 뜬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내 가슴에 품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내 존재와 삶의 토대로 삼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이 길을 가려 합니다. 쉽지도 않고, 무너짐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지만 그래도 ‘페리코레시스’적 삶의 방식을 배우고 익히는 이 길을 가려 합니다. 이 길만이 주님이 인정하는 길이라고 믿기에 그저 묵묵히 한 걸음씩 가려 합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지난 화요일 밤에 삼위일체가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자 기둥이고,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구원은 물론이고, 교회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지,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최고의 진실이 삼위일체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삼위일체가 모든 신학적 주제들을 꿰뚫고 통합하는 실마리라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남은 인생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존재방식인 ‘페리코레시스’적 삶의 양식을 배우고, 삼위일체적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려 합니다. 이것이 제 신앙 여정의 마지막 코스라 생각하고 한 걸음씩 걸어가려 합니다. 오직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길이 없는 이 길, 끝이 없는 이 길, 한없이 좁은 이 길, 그러나 가장 영광스러운 이길, 가장 가슴 뛰고 황홀하기 그지없는 이 길을 여러분과 함께 손 맞잡고 걸어가려 합니다. 한 걸음씩 가다보면 언젠가 주님이 기도하신 세계, 즉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는’ 페리코레시스의 세계,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는’ 페리코레시스의 세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날이 되면 우리 모두 꿈에 그리는 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