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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6-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2016.03.06 20:58

정병선 조회 수:402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3:22-30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306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306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0m9dBto7LjI

(MP3 듣기: 2016년 3월06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0m9dBto7LjI

 

예수님은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인류 역사에 근원적인 변화, 거대한 전환을 가져오신 분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분이고, 예루살렘의 성전체제를 무너뜨린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에게 성전체제를 대표하는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찾아갔습니다. 성전체제를 허물라고 외친 예수님에게 나아가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물으며 배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대답했나요? ‘당신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어머니 배속에서 태어난 생명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거듭나야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이라야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하나님의 생명, 하나님나라의 삶)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하나님의 생명, 하나님나라의 삶)이 없다’(v.36)고 좀 더 확실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덧붙인 이 설명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것에 영생과 죽음이 달려 있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종교적이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습니다. 예수라는 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단순하고 맹목적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걸 믿는 것은 바보라고 생각될 만큼 무모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가장 탁월한 구원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구원의 길일까요? 이 물음에 대해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그의 손에 주셨기 때문이라고(3:35).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아들의 손에 주셨기 때문에 아들을 믿으면 아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믿는 자의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이 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일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부이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세상의 전부입니다. 예수님 안에 세상이 있고, 세상 안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한 분이실 뿐 아니라 세상의 전부이기도 한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라는 분을 믿는 것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한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만물을 경영했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만물을 경영한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온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았듯이 온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간다는 뜻까지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온 세상을 대하고 하루하루를 살았듯이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온 세상을 대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영생은 한 덩어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것까지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믿음으로 사는 것까지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나 구원받았다’로 끝나면 안 돼요. ‘믿음으로 나 구원받았다’로 끝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생(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것까지 가야 참 믿음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는 길일뿐만 아니라 구원을 사는 길이기도 해야 참 믿음입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17)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믿음, 예수 믿는 것에서 끝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입니다. 믿음과 구원, 믿음과 영생, 믿음과 하나님나라는 한 덩어리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구원과 한 덩어리인 믿음, 영생과 한 덩어리인 믿음, 하나님나라와 한 덩어리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단지 예수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신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루하루의 일상을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살아가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세상의 전부이고 역사의 중심이십니다.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나가 금식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고, 그 과정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승리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가나에서는 이적을 행하셨고,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체제를 무너뜨리는 획기적인 일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땅으로 갔습니다.

유대 땅은 이스라엘의 남부에 위치한 사해 서쪽 지역으로서 대부분이 거칠고 황량한 광야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 광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세례도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 또한 세례 사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애논은 ‘샘터’, ‘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물이 많은 곳입니다. 요단강 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물이 많은 그곳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받는 자들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기 전까지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자들이 많았는데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많이 이동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분개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거든요. 예수보다는 세례 요한이 세례 사역의 전문가고 선배거든요. 그런데 졸지에 상황이 역전됐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자보다 예수에게 세례 받는 자들이 더 많진 겁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은근히 경쟁심도 생기고, 시기심도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신 예수라는 이가 세례를 베푸는데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손 놓고 있다가는 망하게 생겼으니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 스승과 예수를 경쟁자로 바라본 겁니다. 사람들이 누구에게로 가느냐, 누가 더 큰 세력을 얻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가까이 있는 두 교회가 서로 경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교회로 사람들이 몰리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바짝 긴장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말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v.27). 무슨 말입니까?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동안 나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은 것도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셔서 그렇게 한 것이고, 지금 예수에게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에게로 돌리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앞서 했던 말을 환기시킵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v.28).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지금 나와 예수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 본 것이다, 나는 예수와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다, 내가 전에 말했지 않느냐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나는 메시아를 위해 앞서 보냄을 받은 자이지 메시아가 아니다, 그러니 너희도 내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해라, 내가 메시아라도 되는 양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해라, 그 말입니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그 일로 속상해하거나 긴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 속 깊이 담아둔 말을 꺼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v.29-30). 이 말은 정말 대단한 말입니다. 이 한 마디 속에 세례 요한의 진면목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은 전부 자기에게 집중합니다. 자기가 주목을 받아야 힘이 나고, 자기에게 이익이 돼야 좋아하고, 자기에게 힘이 돼야 의미를 느끼는 게 사람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해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자기중심으로 판단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누가 크냐 하는 것 가지고 다투었습니다. 성전체제에 속한 자들(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도 하나님을 뜻을 따른다고는 했지만 예수님을 경쟁자로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제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 외에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흥함을 추구한 자가 없었습니다. 다들 자기 유익과 자기 안위에만 매달렸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 인생이 잘 되는 것과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로 사는 것,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 순풍에 돛 단듯이 만사가 잘 굴러가는 것에 그리 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일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리 소중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 사람이 거듭나 하나님나라를 보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달라지고, 죽임살이에서 살림살이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관심사는 우리 인생을 잘 되게 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잘 되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변화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것도 부분적으로 적당히 변화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철저하게 변화하는 걸 의미합니다. 전적인 변화, 철저한 변화, 근본적인 변화야말로 하나님의 진짜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정반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변화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인생이 잘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인생이 잘 되는 것, 내가 성공하는 것, 내가 평안한 것, 내가 은혜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죽은 후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아예 성공하는데 올인합니다. 자기 영역을 확장하는데 올인합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 요한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의 흥함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참 신랑이신 예수님에게 신부인 성도들이 달려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신랑을 시샘하지도 않았고 신부를 가로채지도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결혼 예식을 준비하고는 신랑이 오자 옆으로 비켜섰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리로 비켜서서 신랑과 신부의 만남을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기는 쇠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기쁘게 자신의 운명과 역할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이 된 것도 세례 요한의 이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일 년 중에 해가 가장 짧은 날이 동지인데 이날부터 해가 길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일은 12월 25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하지부터 해가 점점 짧아지기 때문에 하지에 해당하는 6월 24일을 세례 요한의 생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성품이 남달리 훌륭하고 고매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세상의 일부분이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전부라는 것, 자기는 빛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빛이라는 것, 자기는 아래로부터 왔지만 예수님은 위로부터 왔다는 것, 자기는 메시아를 위해 길을 준비하는 자이지만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것, 온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깊이 알았기 때문에 예수의 흥함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고, 자기의 쇠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례 요한을 보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눅7:28)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던 예외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이 보통 이 세 가지를 모릅니다. 온갖 것을 다 아는데 이 세 가지를 몰라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참으로 묘합니다. 이 세 가지를 아는 것이 진짜 공부인데 진짜를 몰라요. 그래서 세상에 휘둘립니다. 여기 기웃거리고 저기 기웃거리며 갈 짓자 걸음을 걷습니다.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욕망의 노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 세 가지를 깊이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흥하고 자기는 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고,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단지 머리로 안 게 아니라 온 몸으로 알았습니다. 깊이 알았습니다. 가슴 절절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고독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거나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기꺼이 쇠하는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길을 가려면 이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거짓에 속지 않고,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겉치레, 거품 다 빼고 진짜 살림살이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자기 길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이 공부에 열심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공부를 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공부는 좀 부족해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이 공부는 정말 중요한 공부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공부입니다. 변화의 열매를 가져다주는 공부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이 공부를 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공부가 쌓이면 쌓일수록 인생의 겉치레와 거품은 사라질 것이고 알곡은 자랄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지 괘념치 않고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공부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