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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43-내 양이 아니므로

2016.11.06 20:15

정병선 조회 수:254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10:22-29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1106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1106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NMfKzH1PgjM

(MP3 듣기: 2016년 11월06일 주일예배설교)

https://www.youtube.com/watch?v=NMfKzH1PgjM

 

누군가 저에게 세상의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를 묻는다면 저는 ‘흑역사’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현실은 그런 고백이 무색할 만큼 온통 어둠으로 가득한 흑여사입니다. 며칠 남지 않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도 흑막으로 가득하고, 대한민국 정부도 흑막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국민은 지금 대통령의 흑역사, 최순실의 흑역사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석고대죄하고 하야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국정이 중단되면 안 된다는 말로 호도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참으로 뻔뻔하고 오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흑역사의 현장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으로 가득한 흑역사의 현장에 오셔서 나는 온 세상을 창조한 로고스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씀은 비유입니다. 앞뒤 맥락 없이 튀어나온 비유가 아니라 구약적인 맥락에서 나온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목자’라는 말이 ‘왕’을 가리키는 비유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한 말씀을 들어봅시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한 목자를 세우겠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34:23-24). 여기서 다윗과 같은 왕이 ‘한 목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왕들을 가리켜 ‘목자들’이라고 표현한 대목도 나옵니다(v.2,5,7,8,9,10). 여기서 ‘목자들’은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왕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예 ‘내가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있게 할지라.”(v.15).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도 ‘내 양떼’라고 말씀했습니다(v.6,8,10-12).

 

이처럼 구약성경(이스라엘)에서 목자는 왕을 가리키는 비유요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자 비유를 통해 두 가지 놀라운 약속을 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 것이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v.11-15).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목자 노릇 제대로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 목자를 세우겠다는 좀 야릇한 약속을 또 했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v.23-24).

이 두 약속은 비슷한 듯 다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겠다는 약속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왕을 이스라엘에 보내겠다는 약속인데, 두 약속은 같은 약속인 것 같으면서도 같은 약속이 아닙니다. 참 묘해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주 묘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씀은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약속한 그 목자로 온 자’라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이스라엘의 목자, 즉 이스라엘의 왕으로 온 자’라는 말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다른 목자들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다른 목자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왕 노릇을 제대로 못했지만 나는 제대로 왕 노릇 하는 목자로 왔다는 말입니다. 왕 노릇을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진정한 왕으로 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나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왕이라고 설명했습니다(v.10). 둘째, 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는 것처럼, 나는 내 양들을 깊이 알고 내 양들도 나를 깊이 아는, 그래서 양들의 필요를 제대로 채워주고 돌봐줄 수 있는 왕이라고 설명했습니다(v.14). 백성과 깊이 소통하는 지혜로운 왕이요 사랑의 왕일 뿐 아니라 백성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왕이라고 설명했습니다(v.15). 셋째, 나는 이 우리(아브라함의 후손) 안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왕일 뿐 아니라 이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이방인)까지도 인도하는 온 세상의 왕이라고 설명했습니다(v.16).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로 이 목자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약속한 그 목자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헬라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그 목자(왕)가 오기를 기다렸고, 지금 로마 치하에서도 그 목자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목자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겠다고 약속한 그 목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건과 행동을 통해 그 목자임을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은 각색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종교의 울타리에 갇힌 자들을 해방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잔치에 참여하고,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사마리아로도 가고, 성전에서 이루어지던 죄 용서를 베풀기도 했는데, 이런 일들은 하나님이 약속한 목자가 오면 하게 될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하게 될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한 목자가 오면 하게 될 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하게 될 일들을 행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그 목자라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이스라엘의 목자(왕, 메시아)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목자(왕,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증거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 행동을 목도하면서도 예수님이 과연 우리가 기다리는 목자(메시아)인지를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 우리를 의혹하게 할 작정이오? 당신이 그리스도(메시아)라면 속 시원하게 명명백백히 말해보시오.”(v.24)라고 짜증 섞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의혹에 빠뜨린 적이 없다. 나는 그동안 충분히 말했다. 나는 충분히 말했는데 너희는 믿지 않는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증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v.25-26). 상당히 명쾌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저들을 의혹에 빠뜨리지 않았다고 변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말과 행동으로 증거했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짤막하게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 이 짧은 한 마디가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리석어서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악해서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 마음이 굳어서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렇게 심오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특히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꼭 묵상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구원의 공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10:9).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예수님께서도 병자들을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마9:22, 15:28, 막10:52). 이처럼 성경이 구원을 말할 때마다 믿음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구원의 공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공식과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므로 내 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정반대로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의 공식에 맞으려면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니 내 양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의 말과도 어긋나고, 우리가 아는 구원 공식과도 어긋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실수를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백 번 옳은 말씀을 했습니다.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근원적인 시각에서 제대로 꿰뚫은 말씀을 했습니다. 사실 믿어서 양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양이기에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냐 구원이 먼저냐 하는 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과 구원의 본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아주 섬세한 이해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공식을 따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공식 속에 어떤 함의가 들어있을 것 같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공식 속에는 믿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함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함의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공식을 따라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믿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중요해지고, 믿음을 강화하게 되고, 믿음에 집착하는 믿음 지상주의, 믿음 만능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한국교회가 그랬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공식만 외치고 쫓아갔습니다. 그 결과 다들 믿음, 믿음,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에 집착했습니다. 믿음 지상주의자, 믿음 만능주의자가 됐습니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올인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올인한 결과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지상주의, 믿음 만능주의가 과연 옳을까요? 믿음이 과연 만능일까요? 믿음으로 능치 못한 일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만능이 아닙니다. 믿음이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구원의 조건도 아닙니다. 솔직히 믿음에는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도 아닙니다. 율법을 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믿음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오직 구원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베푸는 선물입니다. 구원이라는 선물 속에는 굉장히 많은 패키지 선물들이 들어 있는데 그 많은 선물 중에 하나가 믿음입니다.

또 믿음은 양(구원받은 자)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 존재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믿음의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지 믿음이 아닌 방식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구원하실 때 믿음도 함께 준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으니까 믿음을 준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눈으로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구원하면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더 들어보면 보다 확실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v.27-28)고 확언했습니다. 만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공식이 옳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확언할 수 있었을까요? 전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믿음이란 조석으로 변합니다. 사람의 마음보다 더 간사한 것이 없고, 사람의 믿음보다 더 구겨지기 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과연 견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견고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이 우리의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한 로고스요 선한 목자답게, 구원의 주체답게 이 모든 걸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증언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확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눈으로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앎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선한 목자(왕)임을 아는 앎,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아는 앎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앎은 매우 기이한 앎입니다. 이 앎은 나로 말미암지 않은 앎이고,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앎입니다. 이 앎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앎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만 알 수 있는 앎이고,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만 알 수 있는 앎입니다. 두뇌로 아는 앎이 아니고 전인이 아는 앎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이 앎은 단지 예수를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아는 것은 우주만물을 창조한 로고스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아는 앎 속에는 우주만물을 아는 지식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앎은 매우 광대합니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과학이나 돈이나 기술에 의해 파괴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앎을 알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7-8). 옳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깊고 높고 광대하고 고상한 앎입니다. 이 앎이 곧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이 앎,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이 앎에 기초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