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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40-나는 선한 목자

2016.10.09 18:59

정병선 조회 수:324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10:1-15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1009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1009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BMy2DioUsJo

(MP3 듣기: 2016년 10월09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BMy2DioUsJo

 

예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로서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미화하거나 보완하러 오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개혁하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구멍 뚫린 부분을 땜질하러 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러 오셨습니다. 이 세상을 뒤집어엎으러 오셨습니다. 이 세상은 뒤집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뒤집어엎어야만 정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뒤집어엎으러 오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고, 보는 자는 맹인 되게 하러 오셨습니다. 죽은 자는 살리고, 산 자는 멸망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높은 자는 낮추고, 낮은 자는 높이기 위해 오셨습니다. 부자는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게 하러 오셨습니다. 또 이 세상은 돈이 요술을 부리는 세상입니다. 돈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인생을 쥐었다 폈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돈의 권세를 깨뜨리러 오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진정한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데올로기나 폭력으로 세상을 뒤집어엎지 않았습니다. 증오나 분노로 세상을 뒤집어엎지 않았습니다. 총이나 칼로 세상을 뒤집어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서 세상을 뒤집어엎었고, 자유케 하는 진리로서 세상을 새롭게 하였고, 자기 목숨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줌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맹인의 눈을 열어 보게 하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하고, 세리의 기도를 들어줌으로써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사랑의 심판이고, 은혜의 심판이고, 회복의 심판이고, 새로운 창조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익숙한 비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부터 여호와를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불렀고(시23:1), 아삽은 시편80편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부르면서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시80:1)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면서 “여호와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1)라고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만 ‘목자’라고 부른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르시는 지도자도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구하면서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27:17)라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이나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울 때에도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웠습니다(삼하5: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에도 지도자들이 목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심판했습니다(렘23:1-2). 이스라엘에 목자가 없어서 백성들이 흩어지고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겔34:5,8).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불렀고,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또 다른 목자’로 세웠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 또한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모형이 목자와 양의 모습이듯이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관계 모형 또한 목자와 양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떠했습니까? 지도자와 백성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였습니까? 전혀 아니었습니다. 목자들이 살진 양들을 잡아먹는 늑대와 강도짓을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약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23:1-2).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것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겔34:1-8).

목자가 목자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 목자와 양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비판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0:1-2).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10:8).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한 짓은 다 절도요 강도였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바리새인을 비롯해서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목자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들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이 한 짓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것을 트집 잡으며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했습니다.(9:24). 눈 뜬 맹인을 온전히 죄 가운데 태어났다고 비난하며 내쫓았습니다(9:36).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했고, 하나님의 양을 비난하며 내쫓았습니다. 한 마디로 강도짓을 한 겁니다.

 

정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양 떼를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먹이는 목자가 아니라 살진 양들을 잡아먹기에 바쁜 도둑이요 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보시며 심히 탄식하셨습니다.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노 중에도 놀라운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4:10-15). 예,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양들을 찾아서 기름진 꼴을 먹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의 목자요 온 세상의 목자로 오셨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는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요10:10).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잘 먹이고 쉬게 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종내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이 선한 목자임을 입증하셨습니다(10:11). 예수님은 목자이되 첫째로 선하심으로 가득한 목자이셨습니다. 둘째로 자기 양을 아는 목자이셨습니다. 셋째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는 목자이셨습니다.

첫째로 선하다는 것은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목자의 직무를 감당하기에 어떤 부족함도 없었습니다. 지혜, 지식, 사랑, 능력, 온유하심, 선하심, 의로우심, 거룩하심, 긍휼하심 등등에서 온전했습니다. 스펄젼은 예수님의 온전하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위대하며 으뜸 되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이상이 되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들은 아침이슬방울만큼 많을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합쳐도 그분의 광채를 다 반영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분을 온전히 묘사하기에는 인간의 생각이 너무 제한되어 있고, 인간의 언어는 너무 미약합니다. 땅과 하늘의 모든 상징들을 활용하여 그분을 최대한 묘사하려고 해도 여전히 묘사되지 않는 부분이 남습니다.”(요한복음 설교집 1권, 763쪽).

둘째로 온전하신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속속들이 아셨습니다. 양들을 객관적으로 사무적으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전체를 싸잡아 이끌지 않았습니다. 양들 하나하나의 습성이 어떻고, 어떻게 자라왔고, 어디가 약한지를 세세히 알고 그에 맞게 이끌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이보다 더 완전한 앎은 없다) 그렇게 양들을 아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깊이 나를 아십니다. 지금까지 제가 온 길을 돌아보면 ‘아! 예수님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시고 정말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이끌어 오셨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도 개별적으로 완전히 아십니다. 살아오면서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어디가 구멍이 뚫렸는지, 유전자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다 꿰뚫어 아십니다. 그리고 그에 맞게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는 분께서 나를 이끌고 계시고, 나를 감싸고 계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것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능동적으로 순종하여 버렸습니다. 감사함으로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 목자이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목자가 없습니다. 삯꾼 목자나 도둑이나 강도는 많은데 참 목자는 없습니다. 참 목자는 하늘에서 왔습니다. 하늘에서 온 예수님만이 참 목자입니다. 예수님만이 양들을 진실로 알고, 양들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참 목자, 선한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참 생명을 얻고 풍성한 생명을 살려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야 합니다. 선한 목자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사람에게 정말 부족한 것, 정말 필요한 것은 부귀영화나 돈의 권세가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인생이 고단하고 비참한 것도 부귀영화를 얻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생명을 살지 못해서입니다. 생명을 살지 못해서 다들 아우성인 것이고, 생명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을 살지 못해 아우성이면서도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 생명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 부귀영화를 구하는 자들은 많은데 생명을 구하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귀영화를 주러 오지 않고 생명을 주러 왔는데, 생명, 생명, 오직 생명을 살게 하러 왔는데 생명을 살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은 거의 없고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나오는 자들은 많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기이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기가 지금 생명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은 죽음을 살고 있는데, 열심히 경쟁하고 싸우고 미워하고 짓밟고 속이며 죽음을 살고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가 맹인이라는 걸 모르듯이 사람들은 죽음을 살고 있다는 걸 모릅니다. 사실은 날마다 치열하게 죽음을 살고 있는데,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이용하고 짓밟고 죽이며 살고 있는데 그걸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께 나오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겁니다. 다들 자기가 잘났다고 큰소리치며 맹인인 채로 죽음을 살고 있는 겁니다.

정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사는 것은 생명을 사는 게 아닙니다.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생명인 ‘비오스’(Bios)를 살리기 위해서 죽음을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생명인 ‘조에’(Zoe)를 사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인 ‘조에’는 ‘비오스’와 다릅니다. ‘조에’는 아빠 엄마를 통해서는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 안에 거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조에’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오스’를 영원히 살게 하러 온 게 아니라 ‘조에’를 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조에’가 진짜 생명이니까, ‘조에’를 살지 않는 것은 죽음을 사는 것이지 생명을 사는 게 아니니까 ‘조에’를 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부귀영화는 예수님이 주기에는 너무 시시한 것입니다.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부귀영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조에)을 주러 오셨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생명을 얻은 자는 생명을 사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둡니다. 죽음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일인지를 알기 때문에, 부귀영화를 얻고 돈의 권세를 얻는 것이 생명을 사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것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무엇이 됐든 다 생명 이후의 문제로 생각하고, 그저 하루하루 생명을 사는 일에 몸과 마음을 기울입니다. 생명을 사는 것, 조에를 사는 것에 삶의 최우선 순위를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