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logo

서브이미지
subtitle

요한39-예수님의 심판

2016.10.03 08:18

정병선 조회 수:250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9:1-41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1002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1002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QfhXRiViKeI

(MP3 듣기: 2016년 10월02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사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QfhXRiViKeI

 

초막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낸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서 나가신 후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맹인은 초라한 행색으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v.8). 너무도 불쌍한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v.2). 이 질문은 매우 전형적인 질문이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런 사람을 보면 대뜸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큰 재앙이 닥치면 으레 죄를 지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몸이 망가진 욥을 보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예수님 당신의 유대인들도 질병과 재앙을 죄와 연결지어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눈 뜬 맹인과 논쟁하다가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라고 꾸짖었습니다(v34). 죄 가운데서 태어난 놈이 감히 가르치려 한다며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내쫓았습니다.

 

물론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엉터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죄 때문에 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나병이 걸렸고(민12:1-10), 모세의 보냄을 받고 가나안 땅을 정탐했다가 돌아와 악평한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민14:36-38),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들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여 염병을 일으켜 14,700명이 죽은 사건도 있었습니다(민16:41-46). 모세가 백성들에게 ‘너희가 악을 행하면 너희가 망할 때까지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무더위와 가뭄과 마름병과 깜부깃병을 일으킬 것이고, 고치지 못할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신28:22,27). 예수님께서도 중풍병자를 보시고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살아온 삶의 문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죄와 관련짓는 것을 엉터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일반화된 보편타당한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편타당한 생각을 부정했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v.3)라고 부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어떤 오류를 범한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습니다. 질병은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일반화된 생각으로 맹인을 바라보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일반화의 오류란 제한된 정보, 불충분한 자료, 대표성을 결여한 사례 등 을 근거로 하여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오류를 의미하는데, 사람들은 날마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며 삽니다. 몇 가지만 확인해보죠. 혈액형 A형인 남자는 소심하다, O형 남자는 단순하고 낙천적이다, 키 큰 남자는 싱겁다, 아름다운 꽃이 먼저 꺾이듯 미인은 박명(薄命)한다, 전라도 남자는 말이 많고 경상도 남자는 말이 없다, 새벽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믿음 좋은 사람이다, 이런 것들이 다 일반화입니다. 사실은 모든 A형이 똑같지 않은데 A형은 다 소심하다고 일반화해버립니다. A형인데 소심하지 않은 사람 있고, 키 큰데 싱겁지 않은 사람 있고, 전라도 사람인데 말 없는 사람 있고, 미인인데 장수하는 사람 있고, 선한 부모 밑에서 악한 자식이 나오고, 악한 부모 밑에서 선한 자식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그런 사례를 무시하고 너무 쉽게 일반화해버립니다.

 

사람과 컴퓨터를 비교해보면 좀 더 분명해집니다. 컴퓨터는 A를 입력하면 A1이 나옵니다. 이 컴퓨터든 저 컴퓨터든 A를 입력하면 똑같이 A1이 나와요. 아무리 인공지능을 갖춘 컴퓨터라고 해도 입력한 데이터에 근거해서 똑같은 결과물이 나옵니다. 사람은 달라요. 사람은 A를 입력하면 모든 사람에게서 A1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옵니다. A2가 나오기도 하고, A3가 나오기도 하고, A100이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B나 C나 H가 나오기도 합니다. 70억 인류에게 A를 입력하면 70억 가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성격과 반응이 조금씩 다릅니다. 정말입니다. 기계는 닫힌 시스템이라서 일률적이고 규칙적인데 반해 사람은 열린 시스템이라서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통계가 불가능하고, 일반화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제각각 고유하고 독특해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론을 총동원해도 나를 설명할 수 없어요. 나라는 존재는 일반화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존재입니다.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건은 독특합니다. 아무리 비슷한 사건이라 해도 사건마다 배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릅니다.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이라고 해도 사건의 배경이나 성격을 따져보면 다 달라요. 비슷한 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건마다 고유하고 독특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마다 사건마다 고유하고 독특한 것을 다 무시해버리고 비슷한 것들을 대충 묶어서 일반화해버립니다. ‘A형은 소심해’라고 일반화해버립니다. 그것이 지식이고 이론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도 일반화의 산물이고, 플라톤의 이원론도 일반화의 산물이고,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일반화의 산물입니다. 사회학, 심리학, 역사학 등등 모든 학문도 일반화의 산물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가 없는 일반화, 오류가 없는 지식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반화의 오류는 무서운 폭력이 됩니다. ‘A형 남자는 소심해’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화이고, 모든 A형 남자를 향해 ‘당신들은 다 소심한 족속들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화의 폭력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일반화의 오류와 일반화의 폭력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세요. 우리는 날마다 일반화의 폭력을 휘두르며 삽니다. 바리새인들이 맹인에게, 세리에게, 간음한 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리고 예수님에게 일반화의 폭력을 휘둘렀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일반화의 오류에 갇혀 살고, 일반화의 폭력을 휘두르며 삽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의사가 환자에게, 상담가가 피상담자에게, 선생님이 학생에게, 직장 상사가 아랫사람에게, 목사가 성도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일반화의 폭력을 휘두르며 삽니다.

 

오늘 사건에 등장하는 맹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일반화의 폭력에 휘둘리며 살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제자들마저도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맹인이 얼마나 많이 일반화의 폭력에 휘둘렸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고쳐 보게 하기로 맘먹고 맹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고는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했습니다. 맹인은 예수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눈이 뜨였습니다(v.6-7).

여기서 맹인이 눈을 뜬 것은 일차적으로 육신의 눈을 뜬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걸 말하려고 이 사건을 기록한 건 아닙니다. 영의 눈을 뜨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맹인이 눈 뜬 것으로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진 것도 그 때문이고, 예수님이 눈 뜬 맹인을 만나 “네가 인자를 믿느냐?”(v.35)고 물으면서 예수님을 보게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영의 눈을 뜨는 것이고, 영의 눈을 뜨는 것이 진짜 눈을 뜨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어쨌든 맹인은 예수님을 통해 눈을 떴습니다.

 

반면에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어떻게 됐습니까? 저들이 맹인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저들은 본래 눈 밝은 자들로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의 사람들이라고 인정받았습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동시대의 사람도 그렇게 인정하고 존경했습니다. 세리나 죄인들과는 함께 먹지도 않을 만큼 정결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이 뒤집어졌습니다. 저들이야말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진짜 맹인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폭로됐습니다.

예수님이 정확하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v.39).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눈을 어둡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저들이 맹인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은 기가 막혔을 겁니다. 자기들이 앞을 못 보는 맹인이라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맹인이란 말이오?”(v.40). 그러자 예수님께서 확정적으로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맹인이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v.41). 너희가 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죄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으로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본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 죄였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눈 뜨임을 받지 않고 자기들이 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훌륭하고 논리적이고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사람 속에서 나온 것은 다 죄입니다. 아니, 그것이 고상할수록, 훌륭할수록, 논리적일수록, 도덕적일수록 더 큰 죄를 짓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장 훌륭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죄악을 범했습니다. 흠 없는 모양으로 가장 무서운 죄악을 범했습니다. 예수님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바가지를 퍼부은 게 괜히 그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욕은 욕까지도 진리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정확무오 합니다. 사태의 본질을 예리하게 꿰뚫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일반화된 상식과 진리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옳다고 인정받았던 것들, 진리라고 떠받들어졌던 것들, 믿음이라고 확신했던 것들,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하나님의 뜻이라고 따랐던 것들, 본다고 확신했던 것들을 다 뒤집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했고, 보는 자는 맹인 되게 했습니다. 갇힌 자는 해방시키셨고, 자유한 자는 갇히게 했습니다. 병든 자는 고쳐주셨고, 건강한 자는 병들게 했습니다. 죄인은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셨고, 의인은 독사의 자식이 되게 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부유케 하셨고, 부자는 가난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심판을 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똑같은 심판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때가지 세상을 지배하던 모든 질서와 가치가 뒤집어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모든 상식과 지식과 이론이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고 따랐던 것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본다고 확신했던 자들이 맹인임이 드러날 것이고, 의인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독사의 자식임이 드러날 것이고, 부자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가난한 자임이 드러날 것이고, 예수님을 안다고 확신했던 자들이 예수님을 모른다는 게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에는 이런 일들이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일어났지만, 재림 때에는 전체적으로 일어나고 근본적으로 일어나고 돌이킬 수 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모든 인생은 공부를 못해서 망하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망하는 게 아닙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해서 망하는 게 아닙니다. 운이 나빠서 망하는 게 아닙니다. 눈을 뜨지 못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골짜기인지를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고작해야 세상이 정한 길을 가고,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게 되는데 그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지 못하면 뭘 해도 망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망하고, 아무리 반듯하게 살아도 망하고, 아무리 성공을 해도 망합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어쩔 수 없어요. 좌우지간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야 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눈 뜨지 않은 채로 삽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눈 뜨지 못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삽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들이 눈 뜨지 못했다는 걸 모른 채 사는 걸까요? 자기가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 뜨지 않은 채로 사는 것이고, 눈 뜨지 못했다는 것조차도 모른 채 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눈 뜨지 못한 것도 똑같습니다. 자기가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 뜨지 못한 겁니다. 자기가 빛을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끝까지 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겁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본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육신의 눈을 떴으니까,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자기도 보니까, 지식의 눈으로 보고 경험의 눈으로 보니까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들 눈 뜨지 않은 채로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맹인입니다.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껍데기만 보지 속 알갱이는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지구라는 별이 있는지, 왜 허공에 태양이 있고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지, 왜 바다에 고래가 사는지를 알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보는 것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것을 보는 것은 눈 뜬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고, 모든 사람이 보는 것을 본다 해도, 그것은 눈 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만이 눈 뜬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는 것만이 눈 뜬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만 자기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것, 껍데기만 보지 속 알맹이는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지구라는 별이 있는지, 왜 허공에 태양이 있고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지, 왜 바다에 고래가 사는지를 알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정말입니다. 눈 뜬 자는 자기가 맹인임을 알고, 눈 뜨지 못한 자는 자기가 맹인임을 모릅니다. 오히려 자기가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본 것에 따라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v.41). 예, 보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지 않고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이 죄입니다. 자기 눈으로 본 것에 따라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죄입니다. 모든 죄는 자기 눈으로 보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자기 눈으로 보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보십시오. 그래야 눈 뜬 자로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