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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37-간음한 여인을 놓고

2016.09.11 17:44

정병선 조회 수:1094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8:1-11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911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911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zzFAUZZkrV8

 

(MP3 듣기: 2016년 9월11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zzFAUZZkrV8

 

 

요한복음에는 여러 사본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이야기가 없는 사본들이 더러 있습니다. 또 이 이야기는 초막절 논쟁의 전체 흐름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요한복음 원본에는 없었는데 나중에 편입된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뭐 그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간음한 여인 이야기는 예수님의 복음에서 꼭 말해져야 하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정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자 다시 성전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한 여자를 끌고 와서 회중 가운데 세우고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v.4-5). 이 일은 사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도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나와 물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 율법과 로마법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잘 알다시피 당시의 유대는 로마의 통치 하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산헤드린이라는 자치 기구를 통해 율법에 관한 재판도 하고, 행정이나 사법문제를 처리하기도 했지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로마가 직접 관할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것도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했을 때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직접 처형하지 못하고 빌라도 총독에게 데리고 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통치 하에서도 유대인의 정신과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여전히 모세 율법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라’는 모세의 명령을 따라(레20:10)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는 제도를 시행할 만큼 유대인들의 생활은 모세 율법을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직면한 상황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쳐 죽이지 말라고 하면 모세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는 상황입니다.

 

자, 어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꿰뚫어본 예수님은 잠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단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뭐라고 썼는지, 얼마 동안이나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말없이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저들은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는 예수님께 줄기차게 물어댔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허리를 펴시더니 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씀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v.7). 이 한 마디를 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줄기차게 물어대던 자들이 다 입을 닫았습니다. 그러더니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슬슬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서슬 퍼렇던 사람들,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과 간음한 여자만 남았습니다. 몸을 굽혀 땅에 뭔가를 쓰시던 예수님은 다시 몸을 일으키시더니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는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한 마디를 하시고는 여자를 돌려보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장면입니다. 모세 율법과 관련해서, 또 죄와 관련해서 아주 절묘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장면입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그 여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마땅합니다(레20:10,신22:21). 그런데 예수님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된 겁니까? 예수님이 모세 율법을 무시한 겁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들은 대로 행하는 분입니다(요8:29).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온 분입니다(마5:17). 그런 분께서 모세 율법을 무시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정죄하지 않은 걸까요? 율법을 인정한다면 마땅히 돌로 쳐 죽이라고 해야 하는데 왜 돌로 쳐 죽이라고 하지 않은 걸까요? 그것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율법의 궁극적인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율법 이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과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을 살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하고 쌍욕을 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부 외에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까지도 간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자 고치는 것을 죄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 고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막2:27). 이처럼 예수님은 모세 율법을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보다 훨씬 깊이 해석했습니다. 피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근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도 문자대로만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20장에 보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들이 죽 나오는데, 갖가지 형태의 간음을 행한 자 외에도 자식을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자, 신접한 자, 박수무당을 따르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 짐승과 교접하는 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출31:15). 이런 율법을 문자대로만 이해하면 하나님은 참 무자비하고 무지막지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정사정없는 심판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나님이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이십니다. 천대까지 인자함을 베풀며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출34:6-7,느9:17,시85:15). 그렇다면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께서 왜 그렇게 잔인하고 무서운 계명을 말씀한 걸까요? 이런 자도 죽이고 저런 자도 죽이라고 말씀한 걸까요?

 

그걸 이해하려면 왜 이런 계명을 주셨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모든 계명 중의 계명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이 말씀은 ‘십계명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너희를 억압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해낸 하나님, 너희를 자유인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너희를 종살이에서 구해낸 하나님이니까 내가 너희에게 주는 십계명도 너희를 억압하고 정죄하고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 것임을 기억하라’이라는 뜻입니다.

옳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주어진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참된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자유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보존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십계명 자체만 보면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는 부정 명령이 많지만 사실은 ‘억압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율법’입니다. 야고보가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야고보는 십계명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불렀습니다(약2:12). 예수님도 십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긍정의 명령으로 이해했습니다. 결국 십계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겁니다. “너희는 하나님 앞에 선 자유인으로 살아라. 그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간음에 대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간음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적인 탐욕입니다. 육체에 대한 탐욕이고, 쾌락에 대한 탐욕입니다. 사람들은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간음을 행합니다만 인간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든 몽땅 탐욕적입니다.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이 행복하게 되리라고 기대하고, 자신의 욕망을 대상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사랑도 그렇고, 명예에 대한 사랑도 그렇고, 이성에 대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대상이 무엇이든 탐욕적이고, 탐욕적인 사랑은 자유를 파괴하고 존재를 파괴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에게 사로잡히고, 이성을 사랑하면 이성에게 사로잡히고, 돈을 사랑하면 돈에 사로잡히게 되어 결국은 자유를 잃고 삶이 파괴됩니다. 재물을 사랑하면 재물에 사로잡혀 도둑질을 하게 되고, 이성을 사랑하면 이성에 사로잡혀 간음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이미 자유를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존재와 삶을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도둑질을 금하고, 간음을 금하고, 탐내는 것을 금하고,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한 것은 그런 것들에 자유를 빼앗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냈으니 다시는 그런 것들의 노예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십계명 속에 담겨 있는 진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모세 율법을 다 이런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은 이런 뜻으로 읽지 못했습니다. 십계명을 달달 외우기는 했지만 십계명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보고서도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심지어 간음한 여인을 이용해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릴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율법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주어진 게 아닙니다. 율법은 나를 비추어보는 거울로 주어졌습니다. 율법에 비추어 자기를 성찰하라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지, 자유인의 삶을 살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라고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조항에만 매달렸지 율법으로 자기를 성찰하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에 비추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지는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지금 모세 율법으로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고 있는데 더 이상 그 짓거리 하지 말고 율법으로 너희 자신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너희 자신을 바라보고 죄 없다고 생각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씩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뭔가를 들킨 것 같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난 것을 확인한 예수님은 비로소 여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러분, 예수님은 왜 이 대목에서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었을까요? 묻는 것이 인식을 돕는 최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정죄한 자들도 너와 같은 죄를 범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너만 돌에 맞을 죄인이 아니고 너를 정죄한 자들도 돌에 맞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물은 겁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물음 덕분에 이 진실을 깨달았을 겁니다. 자기를 정죄한 자들도 자기와 똑같이 돌에 맞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진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깨달았을 겁니다.

 

진실을 인식시킨 예수님은 한 마디 더 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명증하게 드러낸 최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너는 죄지은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가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돌에 맞아 마땅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정죄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예리하셨지만 정죄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용서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처럼 죄에 대해 엄격하고 예리한 분은 없습니다. 형제에게 분노하고 욕하는 것마저도 살인이라고 보았고, 음흉한 눈으로 여자를 보는 것마저도 간음이라고 볼 만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옳음 속에 감추어진 죄악을 꿰뚫어 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바가지를 퍼부을 만큼 죄에 대해 엄격하고 예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정죄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두가 정죄하는 사람까지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자 현미경으로 바이러스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죄를 들여다보시는 분께서 왜 정죄하지 않은 걸까요? 정죄라고 하는 것은 죄인을 영원히 죄 속에 가두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죄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온 게 아니라 용서하러 오셨기 때문에,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고 잃어버린 자유의 삶을 살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정죄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죄를 깨우치고 드러내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정죄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직 용서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누구라도, 어떤 죄를 범했을지라도 용서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순전히 예수님의 용서 때문입니다. 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은 죄를 범하는 우리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셨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감히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러므로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정죄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정죄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하나님 말씀으로 정죄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 자들의 가장 큰 병폐가 하나님 말씀으로 정죄하는 것인데 절대 정죄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죄를 눈감아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 아둔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는 한없이 엄격하고 민감해야 합니다. 죄와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정죄하지는 마십시오. 사람을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딱 한 분뿐이신데 그분께서는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용서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죄에서 놓여 자유인의 삶으로 나아가라고 용서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삽시다.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는 삶을 삽시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용서받고 용서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날마다 용서받고 용서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