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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36-예수님의 도발

2016.09.04 19:03

정병선 조회 수:222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8:31-59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904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904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IqzSpbdmb0U

(MP3 듣기: 2016년 9월04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IqzSpbdmb0U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너희는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자유롭지도 못하다’는 말을 에둘러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듣기에 상당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시오?”(v.33)라고 항의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자기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이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기들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선민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선민인 자기들은 남의 종이 될 수도 없고, 남의 종이 된 적도 없다는 것이 저들의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거기다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1계명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2계명을 받았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다른 어느 민족보다 자유인이라는 자의식, 남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민족적 자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유대인이 로마에 항전하다가 맛사다에서 최후를 맞은 일화를 보면 그런 자의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A.D. 66년에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1차 유대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는데 최후까지 예루살렘 성전에 남아 저항하던 960여명의 유대인 열심당원(Zealot)들이 엘르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의 지휘 아래 맛사다로 피신하여 3년을 싸웠습니다. 맛사다는 높이가 450m나 되는데다가 거대한 원기둥을 잘라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저도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가봤는데 요새에 올라가보니 길이가 600m, 폭이 250m 정도 되는 평평한 분지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은신하고 항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로마 군사라 해도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맛사다 요새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를 뚫고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 포로를 동원시켜 3년 동안 맛사다 절벽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토담을 쌓는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서야 절벽에 오를 수 있었고, 유대인들의 저항을 뚫고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그 때 유대인 지도자 엘르아살은 로마군이 성벽에 진입하기 하루 전에 마지막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에 하나님 외에는 로마인이나 어떤 사람의 종도 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 우리는 로마 군인에게 항복할 수 없다. 우리끼리 자유인으로 죽자”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누구도 저항하지 않고 엘르아살의 제안을 따랐습니다. 모든 소유물을 한 군데 모아 불사르고, 약한 자들을 가족들이 먼저 죽이고, 열 사람을 제비 뽑아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이고, 마지막 열사람 가운데 다시 한 사람을 제비 뽑아 아홉 명을 죽이고, 최후의 1인도 자살하는 것으로서 항전의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처럼 유대인 속에는 종살이에서 해방됐다는 자의식, 자유인이라는 자의식,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자의식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시오?”(v.33)라고 항의한 것은 일면 옳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의 차원에서는 명백한 거짓입니다. 저들은 이집트와 바벨론과 앗시리아에게 짓밟힌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로마의 지배하에 살고 있습니다. 저들이 지금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 뜰까지도 로마 수비대가 두 눈 부릅뜨고 성에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들의 항의는 역사적 사실에 어긋납니다. 명백한 거짓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역사적 사실보다도 자기들의 내적인 정체성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 된 적이 없다’고 항의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항의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느냐고 꾸짖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로 직행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v.34).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죄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아무리 ‘로마의 종이 아니’라고 항변해도 너희는 지금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기가 찼을 겁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하늘만 멍하니 쳐다봤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하나님을 반역했고, 지금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해방시켜낸 민족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특별한 민족이라는 생각만 했지 죄의 종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너희는 죄의 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기가 찼을 겁니다. 어안이 벙벙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저들은 죄의 종입니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들은 명명백백히 죄의 종입니다. 날마다 죄를 짓고 사는 죄의 종입니다. 저들이 죄의 종이라는 증거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 예수님이 진리를 말하는데도 믿지 않는 것이 죄의 종이라는 명명백백한 증거입니다(v.46).

물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들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믿지 않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 예수를 따르기로 선택할 수도 있고 부처를 따르기로 선택할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죄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그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믿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지금 죄를 범하고 있고, 죄를 범하고 있는 너희는 죄의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은 어떨까요? 우리는 지금 엄청난 자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기 맘대로 소비할 수 있는 소비 자유 시대, 개개인이 자기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누구든 자유를 맘껏 향유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오해입니다. 사람은 오늘도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도 죄의 종이고, 세계 최고의 권력자도 죄의 종이고, 소크라테스도 죄의 종이고, 공자도 죄의 종이고, 부처도 죄의 종이고, 장자도 죄의 종이고, 베드로와 바울도 죄의 종이고, 루터와 칼뱅도 죄의 종이고, 저도 죄의 종이고, 여러분도 죄의 종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선행을 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삽니다. 예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삽니다. 생각으로 죄를 짓고, 말로 죄를 짓고, 눈으로 죄를 짓고, 감정으로 죄를 짓고, 몸으로 죄를 지으며 삽니다. 의식적으로도 죄를 짓고, 무의식적으로도 죄를 짓고, 좌우지간 숨 쉬는 순간마다 거의 죄를 짓고 삽니다. 다윗과 바울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시14, 53, 롬3:10-18). 모든 사람이 죄의 종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내세우며 자기들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항의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너희는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말하는 나를 죽이려 한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며 저들의 항의를 일축했습니다(v.39-40). 그리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충격적인 진실을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v.44).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v.45,47).

이 선언은 정말 충격적인 도발입니다. 근원적인 도발입니다. 저들은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해왔던 자들인데 그런 자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명명백백한 진실이기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고 진실을 말한 겁니다. 예수님이 선언한 대로 저들은 지금 마귀가 행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다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읊조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브라함이 행한 일이 아니라 마귀가 행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고로 진리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모든 상식과 체제를 무너뜨리고, 모든 거짓을 파헤치고,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오직 진리의 길을 갈 뿐입니다. 진리는 영악하지도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습니다. 진리는 오로지 진리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주저함도 없이 진실을 말했고, 어떤 두려움도 없이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진리의 길을 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리의 매서움이요 진리의 힘입니다. 진리를 아는데서 나오는 자유의 힘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아는데서 오는 자유의 힘으로 선포했습니다.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한다만 너희는 사실 죄의 종이다. 너희 아비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마귀이다.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

 

이 선언을 들은 유대인들은 밝은 대낮에 날벼락을 맞은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해머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졌을 겁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는 인내의 한계를 느꼈을 겁니다.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차마 내뱉지 못한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도다.’(v.48). 예, 이 말은 저들이 내뱉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잘 살펴보십시오. 유대인들 가운데 이미 이런 말이 돌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저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마리아 사람이든지 아니면 귀신이 들렸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는 말이 돌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지금까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확실하게 결론내리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신의 말을 들으니 당신의 정체는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됐소.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거나 귀신이 들린 것이 분명하오.’라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러나지 않고 강직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할 뿐 내 영광을 구하지는 않는다.’(v.49-50),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되 나는 안다.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킨다.’(v.55)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v.51).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는 자다’(v.58). 이 말씀을 하자 유대인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저 놈은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하고 돌을 들어 치려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을 피해 성전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길고 긴 초막절 논쟁이 끝납니다. 초막절 논쟁은 처음에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문제로 시작됐는데 마지막에는 유대인들의 정체에 대한 문제로 옮겨져 뜨겁게 불타오르다가 험악하게 끝났습니다. 논쟁이 이처럼 험악하게 끝난 것은 자유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 = 자유인’ 이라는 공식을 확고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공식을 주신 일이 없는데 유대인들은 이 공식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한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보로를 받는 백성인한 우리는 자유인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공식을 철저하게 깨부쉈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내 말에 거하지 않으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다. 즉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내 말에 거하지 않으면 너희는 죄의 종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저들이 붙잡고 있는 공식을 뿌리 채 뒤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격렬하게 항의했고, 마지막에는 돌로 치려했습니다. 초막절의 논쟁은 참으로 험악하게 끝났습니다.

 

예, 이것이 예수님의 운명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운명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 서두에서 말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에 빛을 비추기 원했지만 어둠은 빛을 빛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빛을 거부하고 정죄하고 돌로 치려했습니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으니까 크게 변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사람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받을 복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에게 관심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는 떡고물에 관심이 있지 예수님 말씀에 거하는 일에는 관심 없습니다. 나는 예수 믿었으니 구원 받았다는 공식을 붙잡고 있지 예수님 말씀을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빛을 거부합니다(요3:19-20). 오늘 예수님이 교회에 오셔서 이천 년 전처럼 진리를 선포하시면 소극적인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 것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교회법과 성경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핍박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럴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의 천국입니다. 죄를 보지 않을수록 즐겁고 행복한 천국이 됩니다. 반대로 죄를 보면 볼수록 천국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죄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죄를 보지 않아야만 이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한 천국을 살 수 있으니까 어떻게든지 죄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면 자기 죄가 보이고, 죄가 보이면 이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한 천국을 살기가 어려워지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멀리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 말씀에 거하지는 않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예,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돈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권력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성공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지식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예수님이 자유하게 하는 자유만이 참 자유입니다. 다른 자유는 다 거짓 자유입니다. 불완전한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자유케 하시는 자유만이 참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살려면 말씀에 거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살고, 내가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