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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6:60-71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60626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60626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wBYf7MXVxE8

(MP3 듣기: 2016년 6월26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wBYf7MXVxE8

 

예수님 말씀은 쉽지만 어렵고, 어렵지만 쉽습니다. 단순하지만 심오하고, 심오하지만 단순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이처럼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배우고 못 배우고를 불문하고 장삼이사 누구나 듣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어렵고 심오하기 때문에 누구나 듣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 말씀 중에서도 매우 어렵고 심오합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12제자보다 더 큰 무리의 제자)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v.60)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영어 성경(NIV)은 “This is a hard teaching. Who can accept it?”(저렇게 어려운 가르침을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느냐?)라고 번역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사실 예수나 자기들이나 똑같은 시공간에서 똑같은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도 밥을 먹고 살고, 자기들도 밥을 먹고 살아갑니다. 예수에게도 밥이 생명의 떡이고, 자기들에게도 밥이 생명의 떡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이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밥이 생명의 떡이 아니고 자기가 생명의 떡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생명의 떡이니 자기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 자기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들 속에 생명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납득이 되겠습니까? 납득할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게 당연합니다. 신약학자 레이몬드 브라운은 ‘어렵다’는 단어에 ‘허황되다’와 ‘모욕적이다’라는 두 가지 개념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말 자체는 어려운 말이 아닌데 납득은 안 됩니다. 납득은커녕 허황되게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서 그렇습니다. 개를 끔찍이 사랑하는 주인이 어느 날 개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지금 심장이 뻥 뚫렸거든? 머리 꼭대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거든? 그러니까 꼬리치지 말고 가만있어.’ 아무리 말해도 개는 못 알아듣고 계속 꼬리를 칩니다. 개의 차원과 사람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도 똑같습니다. 차원이 달라서 그런 거예요. 제자들은 인간적인 차원에 갇혀 있는데 반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말하니까, 제자들은 세계 내적인 차원에 묶여 있는데 반해 예수님은 세계를 초월하는 차원의 일을 말하니까, 제자들은 육의 일에 사로잡혀 있는데 반해 예수님은 영적인 일을 말하니까 알아듣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정황을 눈치 채셨습니다. 그래서 슬쩍 말을 건넸습니다. “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v.61). 여기서 ‘걸림이 되느냐’는 물음의 내적인 의미는 ‘믿음을 흔드느냐’입니다. 영어 성경(NIV)에서는 “Does this offend you?” - ‘내 말이 너희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성나게 하느냐? 불쾌하게 하느냐?’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앞뒤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어렵다’고 수군거렸는데 예수님은 ‘걸림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렵다’는 것과 ‘걸림이 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뉘앙스도 다르고 의미도 다릅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어렵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내 말이 그렇게 어려우냐’고 물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묻지 않고 ‘내 말이 걸림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걸까요? 말실수를 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명사수가 표적의 정 중앙을 꿰뚫는 것과 같이 제자들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꿰뚫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 말씀이 ‘어렵다’고만 생각했을 겁니다. 허황되다고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려워서 저런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깔려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제자들에게 걸림이 되고 있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슬쩍 ‘걸림이 되느냐’고 물은 겁니다. 사실입니다. 제자들에게 진짜 문제는 예수님 말씀이 쉽냐 어렵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점차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엉뚱한 쪽으로 흘러간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것이고, 백성들이 배고픔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자기들이 예수의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엉뚱하게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둥,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둥 이상한 이야기를 하니까 ‘어~? 저 양반이 우리가 찾던 메사아가 아닌가봐?’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습니다.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지만 제자들 마음속에는 그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속마음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슬쩍 ‘걸림이 되느냐’고 물은 겁니다. ‘내 말이 그렇게 어렵냐’고 묻지 않고 ‘걸림이 되느냐’고 물은 겁니다. 다시 말하면 본인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마음속 진실을 살짝 건드린 겁니다. 제자들의 속마음을 살짝 꼬집은 겁니다.

 

그리고는 더 깊은 진실을 말씀했습니다. “살리는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v.63). 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영이요 생명에 대한 것이었지 육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은 더럽고 악하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이라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가르고 육은 더럽고 부패한 것이니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과 육은 두 실재를 대표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차원, 하늘의 차원을 말하고, 육은 인간의 차원, 땅의 차원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셨다’고 했을 때의 ‘하늘’과 ‘땅’을 ‘영’과 ‘육’으로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과 육은 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입니다. 둘 다 필요한 것이고 선한 것입니다. 하지만 둘 다 선함에도 불구하고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닙니다. 육은 영에 의해 살려지는 것이지 육이 스스로 생명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은 살 뿐이지 살리지는 못해요. 이것이 영과 육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들은 다 육에 속한 것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보고, 읽고 하는 것에서부터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고, 돈 벌고, 사랑하고, 성공하고, 승진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생명공학을 발전시키고, 정치를 하고, 시민운동을 하고, 하는 것들이 다 육에 속한 것들입니다. 세계 내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것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필요치 않은 게 없습니다. 솔직히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것과 흙수저 물고 태어나는 것은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똑같이 맨 몸뚱이로 태어나기는 하지만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 특별한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삼성이 미치는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도 하고, 국가 경제를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결국 육의 일입니다. 이런 것들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거기서 생명이 나오지 않고, 정치가 아무리 훌륭해도 거기서 생명이 나오지 않고, 생명공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거기서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육에 속한 것을 아무리 쌓아도, 아무리 갈고 닦아도 거기서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육은 생명을 소비할 뿐입니다. 육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생명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열심히 소비하다가 죽음으로 끝납니다. 육은 절대로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육은 생명을 소비할 뿐입니다.

 

영은 다릅니다. 영은 생명을 소비하지 않고 살립니다. 영은 죽은 생명을 살립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마른 뼈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니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피부가 덮였고, 여호와의 생기가 임하니 살아있는 군대가 되었지 않습니까(겔37:1-10).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요6:39). 바울도 말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후3:6). 그렇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만이 생명이 살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생명이 살아납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육이 나쁜 것이고 필요치 않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에 관한한 육은 전적으로 무력하기 때문에, 또 살리는 것은 오직 영이기 때문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병이어 이야기와 묶어서 풀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오병이어의 기적이 낳은 빵과 고기를 먹고 나에게 찾아왔다만 그 빵과 고기는 생명을 잠깐 유지하게 할 뿐이지 살리지는 못해. 생명을 살리는 밥은 따로 있어. 내가 바로 생명의 밥이야.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밥. 그러니 나를 먹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너희 속에 생명이 있게 돼. 이것은 육에 속한 진리가 아니라 영에 속한 진리야. 너희는 지금 이 진리 때문에 흔들리는데 흔들리면 안 돼. 살리는 것은 영이야. 육은 무익해. 생명을 살리지 못해. 생명을 소비할 뿐이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면서 흔들리는 제자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했던 말씀을 한 번 더 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v.65). 이것도 뒤집으면 ‘육은 무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이 무익하다. 어떤 도움도 안 된다.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으로 나를 알지 못하고,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그것으로 나를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네 눈을 열어 보게 해야만 나에게 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가면서 제자들을 설득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결국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세계내적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존재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태양도 하나님이 만들었고, 달도 하나님이 만들었고, 꽃과 나비와 호랑이도 하나님이 만들었고, 사람도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모든 것은 결국 하늘에서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제대로 보려면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봐야만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육의 눈, 세상의 눈으로 보면 껍데기만 보고 부분만 보지 속내와 전체까지 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통해 봐야 속내까지 볼 수 있고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을 어떻게 육의 눈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해야만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눈을 열어줘야만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줘야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고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진리와 진실을 가지고 제자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설득됐습니까? 전혀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제자 중에 많은 사람이 떠났습니다.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v.66). 참 모순이지요? 진짜 진리를 말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말하니까 실망하고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진짜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달려들 것 같은데 반대로 떠났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진리에 관심이 있는 척은 하지만 진짜 관심은 없어요. 생명에 관심이 있는 척은 하지만 진짜 관심은 없어요. 진짜 관심은 다른데 있습니다. 육에 관심이 있습니다. 생명을 소비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돈, 명예, 사랑, 성공, 일등을 쟁취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돈, 명예, 사랑, 성공, 일등이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데 생명이 되지 못하는 일에 생명을 겁니다. 생명이 되는 일은 외면하고 생명이 되지 못하는 일, 생명을 죽이는 일에는 생명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설득조차도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제자 중에 많은 사람이 떠났습니다. 잔뜩 기대하고 왔던 자들이 대부분 실망하고 떠났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v.67). 무슨 말입니까? 너희도 저들처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좇겠느냐, 영을 좇지 않고 육을 좇겠느냐는 말입니다. 이 말뜻을 알아차리고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v.68-69). 예, 베드로는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들 떠나는 걸 보면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세 번 부인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회개하고 돌아왔고,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그걸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로마 병정에 팔아넘겼습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떠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떠날지언정 예수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깊고 신실해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 육에 속한 것들을 부요케 하는 메시아, 생명을 소비하게 하는 메시아로 변형시켜버렸기 때문에 안 떠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잘 믿으면 돈과 명예와 사랑과 성공과 일등과 건강과 장수를 얻는다는데, 거기다가 죽고 난 후까지도 돌봐 준다는데 왜 떠나겠습니까. 예수는 오늘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먹이고 배부르게 해준다는데 왜 떠나겠습니까?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 육에 속한 것들을 부요케 하는 메시아, 생명을 소비하게 하는 메시아로 변형시켜버렸기 때문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통해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 육에 속한 것들을 얻어 보겠다고 난리법석을 하고 있습니다. 변형된 예수를 열심히 좇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변형된 예수 말고 진짜 예수를 알고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처음 믿을 때뿐 아니라 지금도 날마다 진짜 예수를 알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형된 예수를 따르느라고 난리법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살리는 영 안에서 생명살이를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