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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로마서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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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살던 당시의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는 최후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세계의 종교와 철학 어디에도 최후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성경은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성경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의 창조자로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통치하시며 심판을 통해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데(롬2:6-8) 특히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2:16).

 

하나님의 심판과 책임적 존재인 인간

 

예, 하나님은 호랑이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원숭이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태양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폭풍이나 지진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인간에게 세계를 경영할 책임을 부여하셨기 때문에, 또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책임을 오직 인간에게 물으시고, 오직 인간을 심판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 맘대로 살다가 가면 그만인 가벼운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실로 무거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까지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상을 베푸신다고(마10:42).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한 것이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것,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중히 여기시고 심판하십니다.

 

사실 세상의 근심 덩어리는 인간입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불의한 인간에게서 모든 문제가 비롯됩니다. 세상을 살펴보십시오. 정치가 온통 말싸움인 것도, 빈부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것도, 조금만 힘이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갑질하는 것도,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는 것도, 강물이 썩고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도, 닭들이 알 낳는 기계가 되어 고통당하는 것도, 소들이 병에 걸려 비틀거리는 것도,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경쟁에 휘둘리는 것도 다 인간이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세상이 요지경인 것은 인간이 불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거의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고리타분하게 생각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진지하게 듣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어요. 이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람 앞에서 살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고 강조합니다.

 

예, 하나님은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의로우시고, 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차별 없이 오직 진리를 따라 심판하십니다(2:2). 이 심판은 세상을 멸하거나 벌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운 징벌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을 멸하고 벌주기 위해 심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세계를 당신이 보시기에 의로운 세계로 회복하기 위해 심판하십니다. 정의가 무너진 세계를 심판함으로써 정의를 회복하시고, 죽음이 왕 노릇하는 세계를 심판함으로써 생명이 왕 노릇하게 하시고, 분열과 차별로 신음하는 세계를 심판함으로써 모두가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조화로운 세계를 회복하십니다. 바꿔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함으로써 구원하십니다.

육체의 할례와 마음의 할례

 

바울이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불의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예외 없이 정의의 심판을 받는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친절하게도 한 가지 의문을 다룹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심판하신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없는 것이냐, 유대인은 이방인과 다르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는데 그 선택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걸 알고 그 의문을 다룹니다.

예, 유대인은 분명히 이방인과 다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임을 가리키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저들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특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특권을 인정하면서도 율법을 소유한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지 율법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소유한 자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2:13).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육체의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따라 살면 할례가 의미가 있지만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고 말합니다(2:25). 심지어 “표면적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고, 표면적 육신의 할례는 할례가 아니다. 오직 내면이 유대인인 사람이 참 유대인이고, 율법 조문이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다.”(2:28-29)라고 깜짝 놀랄 말을 합니다.

 

바울보다 500년 앞서 활동한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1-33)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겠다.”(렘32:39-4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11:19-20)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이들보다 800년 앞선 모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다.”(신30:6)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율법을 소유하고 육체의 할례를 받았어도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할례(변화)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 - 율법을 소유한 것, 할례를 행한 것, 제사를 드리는 것, 절기를 지키는 것, 정결례를 행하는 것들 - 은 다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때부터 줄기차게 이 말씀을 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사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참 백성이다, 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체의 할례를 통해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육체의 할례에 만족했습니다. 우리 몸에는 할례가 있고,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으니 우리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들은 속은 유대인이 아니고 껍데기만 유대인이었던 겁니다. 마음의 할례는 받지 않고 육체의 할례만 받은 표면적 유대인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 살 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일에 실패하고 넘어졌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할례(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변화)가 인간의 의지로 됩니까? 종교적인 수행으로 됩니까? 간절히 원한다고 됩니까? 안 됩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수행을 한다 해도,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한다 해도 어느 정도의 변화에 그칠 뿐이지 인간의 마음을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모든 욕심과 탐심을 다 내버린다 해도 여전히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는 의로운 삶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를 행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2:29).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도 말한 것처럼 성령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내 마음의 주인이 돼야만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움직이고 새롭게 해야만 비로소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하나님의 열망이 내 열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성령이 와야만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를 행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를 살게 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의 삶을 살게 하려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의 삶을 살게 하려고 그런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율법을 준 것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의 삶을 살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세계 열방 앞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의 삶이 살게 하려고 그런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 사명과 책임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저들이 육체의 할례만 받았지 마음의 할례는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따라 살지는 못한 것입니다.

 

말씀샘교회는 어떻습니까? 말씀샘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고 행하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지금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듣고 정직하게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말씀의 생수에 목이 갈한 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귀하게 보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샘교회에 말씀의 은혜를 풍성하게 허락해주셨습니다. 부족한 제가 설교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깨우침을 주셨고,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나게 하셨고, 그래서 제 능력 이상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샘교회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강점이 많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곧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열망도 있고, 주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뜨거운 갈망도 있고, 실제로 온 성도들이 꾀부리지 않고 은혜를 따라 살고자 애썼습니다. 점심 식사 준비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지금껏 한 마디 불평 없이 기쁘게 돌아가며 최선의 수고를 했습니다. 제가 힘들고 지칠 때 여러분이 위로해주고 지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항상 2%가 부족했습니다. 많은 은혜와 여러 강점에도 불구하고, 또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뜨거운 갈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강점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곰곰이 성찰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커다란 진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도가 부족했다는 것. 예, 말씀샘교회는 말씀은 있었으나 기도가 부족했습니다. 말씀의 은혜는 풍성했으나 기도의 은혜는 빈약했습니다. 기도해야 받은 말씀, 받은 은혜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기도해야 마음이 할례를 받아 가난해지고 새로워지는데, 기도해야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주님의 뜻 행하기만을 사모하며 살게 될 터인데,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받은 은혜대로 살 힘이 2% 부족했던 것이고, 주님의 뜻을 따라 피차 인내하며 용납하는 일에도 2%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돌아보니 제 책임이 크더군요. 제가 앞장서서 기도했어야 하는데 제가 앞장서서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기도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좀 더 깊이 엎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더 낮아지지 못한 것이고,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작은 난관 앞에서 염려했던 것이고,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성령의 공동체가 되지 못한 것이고,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왕 되신 하나님을 높이지 못한 것이고,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저에게 좀 더 기도하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끌어안고 기도하고, 교회를 끌어안고 기도하고, 성도들을 품고 기도하라고 도전하셨습니다. 말씀샘교회가 기도가 부족하다고 일깨워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겸허히 엎드려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한 편으로는 책망으로 다가왔고 또 한 편으로는 격려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주님의 책망도 감사했고, 주님의 격려도 감사했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주신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이것입니다. [말씀샘교회 위에 기도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우리 모두의 심령 속에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옵소서. 주님 이 가을에는 말씀샘교회가 기도하게 하소서. 온 성도가 마음의 할례를 받게 하소서.] 저는 9월 내내 이 기도 제목을 붙잡고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한 마음으로 기도에 동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말씀이 아무리 좋고 은혜로워도, 나아가는 방향이 옳아도 말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말씀에 기도가 뒤따라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 세상을 이기는 말씀, 내 안의 불의를 깨부수는 능력의 망치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가을의 초입에 우리 모두 기도의 은혜를 사모하며 엎드리면 좋겠습니다. 깊이 기도함으로써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면 좋겠습니다. 깊이 기도함으로써 성령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할례를 받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