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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9-불의한 인간

2018.09.02 20:25

정병선 조회 수:151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로마서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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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은 뭘까요? 공기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자비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이 사실을 인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진노와 자비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는 것,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하나님의 자비 아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진노는 몇몇 악당들에게만 임하는 특별한 저주나 재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사람 위에 보편적으로 임합니다. 밤의 어둠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임하듯이 하나님의 진노 또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임합니다. 어린 아이 위에도, 죽어가는 노인 위에도, 천하의 악당에게도, 법 없이도 사는 무골호인(無骨好人)에게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불의한 인간

 

왜냐하면 인간 안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 경건하지 않은 것, 불의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일뿐이기 때문입니다(요3:6). 바울도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8:6,8). 그렇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의는 결코 의가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의는 완전할수록 불의합니다. 완전할수록 그 불의가 무섭고 완고하고 자폐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완벽할 정도로 의로워 보인다고 해봅시다. 흠 없이 깨끗해 보인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완벽하게 외식하는 사람이지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은 결코 의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의로울수록 불의합니다. 의로울수록 그 불의가 크고 무섭고 견고하고 영악하고 깊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의는 한 마디로 반생명적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굉장히 의로워 보이는데 그 의가 생명을 살리지 못해요. 오히려 생명을 죽입니다. 자기 생명도 죽이고, 다른 생명도 죽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원 진실입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불의합니다. 의를 행할 능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의롭기 위해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깊은 불의의 늪에 빠집니다. 인간이란 이처럼 전적으로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어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한없이 비루하고 왜곡되고 괴팍스럽고 흉측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다들 나름대로 열심히들 살고 있지 않느냐, 탈세하는 놈도 있지만 세금 낼 것 내면서 정당하게 양심적으로 사는 자들이 많지 않느냐, 다른 사람에게 못할 짓 안 하면서 살고 있지 않느냐, 나도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근원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정직하게 살펴보십시오. 인간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사는 것이 죄 짓는 일입니다. 인간은 단 하루도 죄 짓지 않고는 못살아요.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죄를 짓지 않고는 하루도 못삽니다. 우리 모두는 너에게 죄를 짓고, 모든 생명에게 죄를 짓고,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죄를 짓고, 아내는 남편에게 죄를 짓고, 부모는 자식에게 죄를 짓고, 자식은 부모에게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이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날마다 경험하는 눈앞의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들은 온통 죄입니다. 더럽고 추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도, 죽어가는 노인도, 천하의 악당도, 법 없이도 사는 무골호인(無骨好人)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진노 밖에서 살 수 없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진노를 먹고 마시며 삽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단하고 불편하고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힘들고 허무한 것입니다.

 

판단하는 죄

 

그러면 사람들이 몰라서 이렇게 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놀랍게도 자기가 행하는 것들이 죽어 마땅한 짓이라는 걸 압니다(롬1:32). 죽어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법규를 압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살인하고, 분쟁하고, 거짓말하고, 수군거리고, 비방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거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도모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무정하게 사는 겁니다. 알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하는데, 알면 하나님께 죄 지었다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넙죽 엎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죽어 마땅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죽어 마땅한 짓을 합니다. 아주 고집스럽게 온갖 이유를 대가면서 죽어 마땅한 짓을 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판단할 줄도 알아요. 다른 사람이 행한 것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을 기막히게 판단합니다. 유치원 아이들도 친구들이 잘못한 것은 빠삭하게 알고 지적합니다. 이건 나쁜 짓이야, 선생님께 벌 받아야 돼, 라고 야무지게 다그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돌아서서 같은 죄악을 범합니다(v.3). 다른 사람이 짜증내고 화내면 [왜 짜증내고 지랄이야. 짜증내지 마]라고 말하는데, 돌아서서는 자기도 똑같이 짜증내고 화냅니다. 이것이 인간이에요. 인간은 죽어 마땅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죽어 마땅한 짓을 행하고, 다른 사람의 죄악을 판단하면서도 같은 죄악을 범합니다.

 

정말입니다. 인간은 판단하며 삽니다. 작은 일 하나까지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판단하며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 판단하는 이것이 바로 불의 중의 불의입니다. 판단하는 일체의 행위가 불의입니다.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 순간,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불의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판단은 결코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 우리의 판단은 절대 옳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그릇된 판단이거나 왜곡된 판단일 경우가 많고, 기껏해야 부분적인 판단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결단코 온전하지 않습니다. 온전하게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8:15-16) 예, 온전하게 판단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판단을 중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판단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죄 중에서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인 것입니다.

 

여러분, 판단 받으면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일거수일투족을 판단 받으면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숨이 막히고 심장이 떨려서 못삽니다. 영혼이 흔들려서 견디기 힘듭니다. 왕따를 당하는 자들이 자살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한 사람에게 판단을 받아도 영혼이 흔들리는데 집단적으로 판단 받으면 그 영혼이 얼마나 흔들리겠습니까. 그 영혼이 얼마나 쪼그라들고 위축되겠습니까. 너무 힘들고 수치스러우니까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하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판단하는 것은 너무너무 무서운 일입니다. 판단하는 자와는 함께 살기 힘들어요. 사실 판단한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분리요 떠남입니다. 그래서 판단하는 자와는 함께 살기 힘들어요. 함께 살려면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판단하지 않고 지켜봐야 합니다. 조용히 용납하며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든, 교회 안에서든 서로가 판단하지 않고 용납하고 기다려줘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롬14:10)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라.”(롬14:13) 야고보도 말했습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2) 예, 판단하지 마십시오. 죽어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정말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이 행위, 사람의 영혼을 마구 흔들어대는 이 행위를 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판단하지 않을 수 없지만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판단하지 않아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용납하고 기다려줘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아야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불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의 말을 짧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헛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긴다. 자기들이 행하는 짓이 죽어 마땅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죽어 마땅한 짓을 행한다. 남의 잘못은 잘도 판단하면서 같은 잘못을 범한다.] 이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경배하고, 자기가 행하는 것이 죽어 마땅한 짓인 줄 알면서도 죽어 마땅한 짓을 반복하고, 남의 잘못은 판단하면서도 같은 잘못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랬고, 공자도 그랬고, 성 프란시스도 그랬고, 간디도 그랬고, 톨스토이도 그랬고, 칼 바르트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쩌자고 인간이 이렇게 사는 것을 내버려두십니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두십니다. 물론 이것은 방관도 아니고 포기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방관하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세요. 쉼 없이 지켜보시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하나님의 마음이 너그러워서일까요? 더 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아서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하려고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아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놓은 구원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알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롬2:4).

 

예,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나오는 것들은 하나 같이 불의한 것들뿐이라는 것, 그런 나에게 임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아는 것이 진짜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진짜로 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모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존재와 행위가 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삽니다.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니까, 말할 수 없는 인자하심으로 참고 또 참으시니까 하나님의 진노 같은 건 없다고 멸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오만방자하게 삽니다.

바울은 이런 인간을 향해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십니까?(v.3)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한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v.6) 예,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세요. 우리의 겉모양에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위선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동기를 살피시며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은 진리를 따라 이루어집니다(v.2).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심판하시고,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심판하십니다(v.7-8). 우리 모두는 이 심판을 받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심판을 부정하고 외면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희망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성경이 쉼 없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다. 하나님은 심판자시다. 인간은 불의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을 겁박하는 말이라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를 겁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 인간은 모두 불의하다는 것, 사는 것이 곧 죄 짓는 일이라는 것,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고 있으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있게 되기 때문에 그토록 쉼 없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와 삶이 온통 어둠이고 죄악이고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자기 의를 부인할 수 있고, 악행을 멈출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하나님 노릇을 멈출 수 있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아를 확대하는 어리석은 놀이를 멈출 수 있기 때문에 그토록 쉼 없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참 오묘합니다. 사람은 자기 불의를 알 때만 선을 행합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선, 자기 의로서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서의 선을 행합니다. 자기 불의를 모르면 절대 하나님의 의로서의 선을 행할 수 없어요. 자기 불의를 모르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 자기 의만 커집니다. 선을 행할수록 자기 의만 커지고 강고해져서 결국 더 불의하게 되고, 자기 의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고 인간의 불의를 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불의를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의로서의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불의를 제일 먼저 고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는 것인데, 인간이 자기 의에 대하여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져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인간 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불의를 가감 없이 고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불의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알고 자기 의를 포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윤리는 인간의 의를 강조하고 인간의 의를 북돋아주기 위해 애씁니다. 반면에 성경은 인간의 의를 완전히 깨부수기 위해 애씁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의를 깨부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를 깨부수기 위해 진노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진노로 일하세요.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써 우리의 불의를 깨뜨리시고, 진노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죄인으로 폭로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복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안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성공하는 것이겠습니까?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것이겠습니까? 시련 없이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불의를 알고,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자기의 불의를 알고,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세상의 복은 순간적인 복입니다. 아침 안개와 같이 허망한 복입니다. 생명을 죽이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복입니다. 그러나 이복은 영원한 복입니다. 영광스러운 복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온전케 하는 복입니다. 세상을 복되게 하는 복입니다. 여러분도 이 복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이 복에 눈뜬 자가 진짜 복을 받은 자이고,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