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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로마서8:26-30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50118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50118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www.youtube.com/watch?v=2k9VjSqgdCA

  (MP3 듣기: 2015년 1월 18일 주일예배설교)

  ( 동영상 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2k9VjSqgdCA )

 

종교개혁 신학의 선구자인 루터와 칼뱅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원죄 교리, 즉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를 물려받는다는 원죄 교리를 받아들여,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며, 인간의 의지 또한 부패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루터는 인간의 의지는 ‘노예 의지’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선과 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오직 악을 선택할 의지 밖에 없는 ‘노예의지’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했습니다.

매우 옳은 지적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의 의지가 ‘자유 의지’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든 맘대로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공부가 맘대로 됩니까? 담배를 끊고 싶다고 해서 담배가 맘대로 끊어집니까? 내 의지대로 마음과 감정이 움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행하겠다고 발버둥 쳐도 선을 행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설사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의 선한 행동 속에 열 가지 악이 섞여 있기 십상입니다. 선을 행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악을 범하는 경우 또한 의외로 많습니다. 정말입니다. 루터가 말한 대로 인간의 의지는 죄의 지배를 받는 ‘노예 의지’에 불과하지 우리가 상상하는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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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가 아무리 썩은 노예의지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어쨌든 인간은 의지가 살아 있는 의지적 존재입니다. 의지의 주인인 주체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아무리 부패하고 어두워졌다 해도 그 이성으로 눈부신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고 찬란한 문명을 일구어냈듯이, 인간의 의지 또한 아무리 부패하고 무기력하다 해도 어쨌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역사의 수많은 역경과 고난과 절망을 이겨내면서 지금까지 살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의 의를 성취할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택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의지가 살아있는 가운데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은 맞지만 컴퓨터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듯이 나를 다루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나를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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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제가 구원받은 내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스무 살 되던 해 1월에 구원받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에 나가본 적도 없고, 성경을 배워본 적도 없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종교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참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은 있었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해했을 뿐 종교적인 관심도 없었고,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나 절망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바로 위에 형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더니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신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설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앙을 결사반대했습니다. 젊은 청년이 자기 힘으로 인생 살 생각을 해야지 있지도 않은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되겠느냐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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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제 안에 묘한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세상에 형이 동생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만일 형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사실이고, 그분이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사실이라면 - 마땅히 그분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세상을 만드신 분도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너무 뻔뻔한 일 아닐까’ 하는 묘한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형에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가는 길에 형이 나가던 교회 대학부 회장을 만났습니다. 대학부 회장은 나를 보더니 대뜸 오늘 대학부 수련회를 떠나는데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형에게 묻고 형이 동의하면 가겠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도서관 가는 걸 포기하고 집에 가서 형에게 자초지종을 말했습니다. 형은 같이 가자고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게 대학부 수련회에 참여했습니다. 대학부 회원들도 낯설었고, 예배도 낯설었고, 찬양도 낯설었고, 설교도 낯설었습니다. 대학부를 지도하는 전도사님의 설교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맹랑하게만 들렸습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라고 생각됐습니다. 밤이 됐습니다. 온 세상이 캄캄한데 무슨 일인지 다들 산 중턱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도 무작정 따라갔습니다. 어느 정도 올라가자 전도사님께서 한 사람씩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줬습니다. 제 머리에도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전도사님의 손가락 힘이 얼마나 센지 머리만 아팠습니다. 그렇게 안수기도가 끝나자 사람들이 주변으로 흩어져 저만 홀로 멍하니 남아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여기저기서 작은 기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도 혼자 멍하게 있기가 뭐해서 조그만 바위 밑으로 걸어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라는 생각도 없이 그냥 마음의 생각을 중얼중얼했습니다.

“하나님, 나도 참 웃깁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다고 하기에 하나님이라고 한 번 해봤을 따름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사람도 만들고 지금도 살아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나는 다른 하나님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다면 나는 그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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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몇 마디를 중얼대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곧바로 일어나서는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숙소로 내려와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이튼 날 새벽이 되었습니다. 새벽예배에도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더군요.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도사님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거였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거였습니다. 저 스스로도 의아했습니다. 어? 이상하다? 왜 이렇게 다 수긍이 되지? 어제만 해도 전부 엉터리로 들렸는데 왜 다 옳은 소리로 들리지? 정말 저도 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간밤에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한 것도 아니었고, 꿈속에서 환상을 본 것도 아니었는데 희한하게도 말씀이 들렸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에는 온 천지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밟고 있는 모래알 하나도 새로웠고, 온 산의 나무들이 다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제가 우주의 왕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부터 제 발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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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좀 길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살펴보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저는 사전에 성경을 배운 적도 없었고, 믿음을 갖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었습니다. 단지 작은 의욕이 있었습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참 하나님이 있다면 그 분을 알고 싶다는 아주 작은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음의 움직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 의지로 하나님을 믿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믿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구원받을 때에 하나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니었습니다. 내 의지를 따라 행동하는 살아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은 것은 아닙니다. 묘하게도 믿어졌습니다. 어떻게 믿어졌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믿어졌고, 믿어져서 믿었습니다.

사실 제 경우만 그런 건 아닙니다. 사람마다 믿음에 이르는 과정이 다 다르고 경험도 다 다르지만 모든 참된 믿음은 믿어져서 믿는 믿음입니다. ‘믿어져서 믿는’ 믿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이고,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고,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3-14)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은 항상 사람 안에서 행하시는데, 하나님의 뜻을 강제로 기계적으로 밀고 나가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어 자발적으로 행하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지 않으면서 다스리십니다. 다스림 없이 다스리십니다.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하나님의 일하심)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요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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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까요? 왜 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도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경계가 있으면서도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과 나 사이에는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면서도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와의 경계가 있으면서도 경계가 없으십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경계지을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습니다. 아무리 영적 분별력이 탁월한 사람이라도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경계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경계지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림 없이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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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죄와 사망의 법을 뛰어넘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방식’(v.27)으로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하신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신다(v.29-30). 앞에서는 성령께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방식,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매우 겸허하게 일하신다고 했고, 뒤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따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정하신 대로 이후의 일들이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앞뒤의 뉘앙스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v.28)는 아주 절묘한 말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이나 사태를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돕고 이끌어 가신다는 뜻,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어떤 사태가 빚어지더라도 그 모든 일을 통해 결국 선을 이루신다(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착착 진행되는 게 아니라 유기적인 방식 인격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뜻,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짓밟으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와 부딪치면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통과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식입니다. 다스림 없이 다스리는 방식,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치하는 방식,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한 사람의 삶을 이끌어 가시고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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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편소설 서유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날고 기는 재주를 맘껏 부립니다. 하지만 손오공이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부려도 삼장법사의 뜻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무리 활개를 친다 해도 하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아담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먹었지만 그랬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너졌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꿋꿋이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루터나 칼뱅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주권을 무너뜨릴 거라고 염려했지만 하나님의 주권은 그렇게 시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구멍이 뚫릴 만큼 그렇게 허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넉넉히 품고도 남을 만큼 넓고 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치하십니다. 다스림 없이 다스리십니다.

물론 이것은 신비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치하시는 것, 다스림 없이 다스리시는 것,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양립시켜가면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은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신비입니다. 바울은 이 신비를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표현했습니다. 또 이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놀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탄복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짜 실력이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참모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신비를 단선적으로 좁게 이해하지 않았어요. 원인론적인 해석의 틀로 이해하지 않았어요. 원인론적인 해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틀로 해석했습니다. 다스림 없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이 해석의 틀을 ‘통치론적 해석’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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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론적 해석은 원인론적 해석과 대비됩니다. 원인론적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대립하지만, 통치론적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숨 쉴 여지가 생기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활개를 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는 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양립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동안 많은 신학자와 그리스도인들은 원인론적 해석만을 고수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좁고 편협하게 비틀고 왜곡했으며, 인간의 책임성과 자유를 방기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성도들의 인간성과 삶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세워 자기 선택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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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원인론적 해석에 갇히지 마십시오. 원인론적 해석의 틀 속에 하나님을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인과론의 틀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서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시고,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치하십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조차 되지 않는 일이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이 눈으로 세상만사와 인생살이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삶의 지평이 놀랍게 확장되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깊이 신뢰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유의 축복을 맘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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