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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신학의 정의와 신학의 필요성  그에따른 교리와의 관계 거기서 파생되는  신학의 분류 
를 공부 하고져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위해  과연 신학이 필요한가 ?  왜 평신도의 삶에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와 목적을 상세히 설명을 하면서 신학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나름 건강한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에 접근하여 우리들의 생활 식습관과의 TV 건강 정보 프로그램 의 상관
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접근하면서 예를 들면 효율적인 건강 법을 찾게 함으로써 결국에는 
환자 당사자와 가족들의 정신건강 에 까지 도움을 주어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 가듯 

신학의 역할 기능도  몸에 대한 지식없이 건강을 찾는 사람이 없듯이 신학의 역할과 기능도 
이와 매우 유사하다며  신학의 필요성  중요성 을  화두로 삼고  또한 계량화 하여 분석화 
하는데 매우 어려움이 있다며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며  광범위한  신학의  바른이해와 
어느 유치부 소년 시절 “하나님의 오줌” 이라는 이야기를 하여 우리는 본래  신학이라는 학문을 하지 않더라도  나름 인간에게는 “신학적인 활동” 이 일어난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됨으로써 하나님 알아가는 데 통찰력 깊은 사고와 경외성을 알아가는 데 충분한  필요조건을 제시하여준다.
 

인간의 의식속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신학활동을  언어를 통해  구체화 시키고 
과거의 전통이나 현대  연구물 등의  도움을 받아 일관성과 명료성을 높이며  소통가능한 
형식으로써 표현되는 것이 “신학” 이라고 하였으며  중세 신학자는 신학을 라틴어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학” 이다  라고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학의 무용론”을 제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공부하기 보다는  너무 쉽게 사회나 문화를 적대시 하지 
않았었는가.   우리 한국 교회의 이그러진 모습을 “ 신학의부재” 에서 나온 것이 아닐 런지 
자문 하고 있다.

 

신학을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무의식적 형성해왔고 “우리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기만의 잘못된 신앙을 고정하고 극복 하기 위함” 이라고 설명 하고 있으며.
내가 공부한적 없는 신학을 어떻게 내속안에 잠재력이 들어있을수 있겠는가 의  질문은.
인간의 정신은 일상에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정보를 재료삼아 지식을 부지불식(不知不食) 간에 형성 해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쭉 거기에 따른  논리를 합당하게 서술 하게 되고 .
따라서 신학 공부는 자기안에 자리잡아 있을지 모르는 암묵(暗默)적인 신학(神學)을 성찰 하고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의대생들의 커리큘럼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 하는데 있어 기초가 튼실해야 지금은 필요가 경(輕) 하게 느껴질 지라도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도 중요하지 않는 단계가 없음을 필자는.  직시시켜 나아가고 있다 .


신학을 공부하면서 설교를 듣거나 찬양을 할 때처럼 마음이 감동이 생기면 좋겠지만. 
감동을 주는 자체는 신학의 목적이 될수 없음을 신학의 경영학처럼 기획(企劃) 이나 인사(人事) 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면 이상적이겠지만 유용성 (有用性) 그 자체가 신학의 존재이유.
(存在 李儒) 가 될수 없다.라는 것이다.


 교리 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 이다. 
교리를 형성하고 이해라는 데 신학이 필수 이겠지만  신학과 교리는 같은 것이 아님을 설명 한다  교리가 그리스도인이 함께 공유 하는 것이라면. 신학은 사람과 시대에 따라 조금 씩 
다를수가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 (三位 一體) 교리를 그리스도인이 다 믿는 다 하더라도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신학과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의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학을 한다 하여 오류 없는 무오한 지식을 얻을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리는 무엇이 믿음의 내용인지를 알려주면서 신학의 상상력을 인도하여 개인의 그리스도 인으로써 상승하고 공동체를 형성 하도록 도와준다  신학자의 세균도가 아름 답게  표현을 했듯 
교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교육 과정 이다 .


신학적 사유를 언어의 교리를 통하여서 익히다보면 현실에 논리에 익숙 해져서 우리는  생각과 감정이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게 되어 진다 

교리는 그리스도인이 꼭 알아야 할 정보를 모아놓은 책과 사전이나 무엇을 해야할지 나열한 
규정집으로 잘못 이해하면  오히려 교리는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부 자유하게하는 
강압적인 종교적 교훈과 규율 자체가 되어 버린다 .

 

교회를 나무라  비유한다면 철학적 신학은 뿌리이고 역사적 신학은 줄기이며  실천적 신학은 가지와 열매인 셈 
나무가 수분과 양분을 뿌리로 흡수해 끌어 올려 가지의 잎으로 광합성을 하여 열매를 만들어 내듯 신학의 교회 지도 역할은 철학적 신학에서 시작하여 결실을 맺게 되다. 
신학의 각분야는 각자의 전문성에 따라 발전 해야 하지만  결국 교회 공동체에서의  삶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유기체적인 관계 (有機體的 官契) 라고 할수 있다. 


성서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선 믿으며 순종 해야 한다 
다음은 이성의 힘으로 어떤 사람이든 필연적으로 결론을 내릴수 있는 바가 온다 
그 이후에야 교회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다른 모든 사소한 일들은 교회의 권위로 참되고 
선하다고 생각되어 정의한 바에 따라서 이성 과 일치 하는 한에서  처리 하게 되어진다 

성서는 신앙의 기초 근원 진실(根源 眞實)을 제공한다.
전통은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여야 할지 인도 해 준다 
이성은 성서와 전통을 현 상황에 어떻게 적용 즉 적용점을 가르쳐준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이성 경험을 신학의 자료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
다양한 영양소를 균형있게 섭취해야 몸이 건강해지듯 성서와 전통과 이성이라는 자료를 
균형감 있게 사용할 때 만 건강한 신학으로 성장 할수 있는 것이다.


신앙의 근원기초 진실로 써 건강한 신앙으로써의 신학을 기대해 본다.

신학에서의 전통는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전통에 대해 너무 낭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또한 경계 해야한다.

현재와 대화하지 못하거나 현재의 복잡성을 단순화 하거나 미래에 대한 개방성을 
좀 먹는 경직된 과거의 권위만큼 위선적이고 위험한 일도 찾아보기 힘들다.


리처드 후커가 지적했듯이 전통은 어디까지나 성서의 권위 밑에 있어야 하고 
또한 이성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토 되고 때로는 수정 되며 보완 될 필요가 있다

신앙을 가지면 신앙은 그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자기가 믿은바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찾아 움직이게 된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 신앙의 논리로써만 
구성된 명제들의 체제로 환원 될수도 있지만  합리적인 성장을 도외시하는 맹목적인 
믿음에 필연적으로 머물수도 있다는 것 이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찾아 움직일 때  합리적인  이성의역활은 매우 중요하다 
이성은 계시의 내용을 스스로 만들거나 구원의 가능성을 창조하지는 않지만 
계시를 이해하고 분석함으로 소통 가능하게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분석 해석 적용등의 기능은  이성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가 
없이는 신앙의 이해를 이끄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이것이 신학 이다.
신학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신학에서는 다양한 자료가 무엇보다 더 중요하며 
무의식속에 여러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썩어 쓰는 것 보다 신학의 자료를 필요로 할수 없음을 
겸허하게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건강한 신학을 할수 있는 방법이다.

 

신학은  각자의 자료들의 유기적으로 만들어줄 통합적인 주제가 없다면 일관성을 상실하게 
되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수가 있으며 심지어 한번 퍼지면 겉잡을수 없이 곳곳에 달라붙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갈아먹는 책벌레처럼 여기저기서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 정보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잠식 할수도 있게 된다.
 
전통과 이성의 경험은 그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위한 선한 
쓰임새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써 쓰인 성경의 빛에 따라 신학을 할 때. 
“하나님의 숨결”이 너무나도 인간적이기까지 한  전통과 이성과 경험을 새롭게 역어 가면서 
그 사이사이로 새로운 생명을 불러 일으킬수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마치 여호와의 말씀이 마른 뼈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여호와의 생기가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듯이 말이다.

 

성서 하나님의 말씀 인가 인간의 쓴 책인가.  인간은  인간의 초점으로 맞추어 생각하는 생각하예  인간의 관점으로써 만의 생각의 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나 신앙인들에게는 성서는 결국 무엇보다더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의 운동력이 늘 함께 잠재되어 있는 
우리가 애타게 갈구하게 되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전지를 보여주는 힘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
동시에 인간에 의해 기록된 책이기도 한다 는 사실 이다.   
 하나님의 말씀 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서술한 책임을  기억하지 않을수 없으며 
또 여기서 인간의 요소를 무시하게 된다면 성서는 우상화될 위험성 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분리 되는 화법 즉 “유체이탈법” “喩體 離脫法” 話法 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이다.

 

하나님 께서 인간 저자들의 독특성을 하나님 말씀 에 전달되는 매체로 인정하셨기에 성서를 
꼼꼼히 읽다보면 복수의 인간 저자들이  흔적이라 할수 있는 다양한 역사 문화 신학 글쓰기 방식 독자층이 발견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바로 해석하기위해서는 CSBI 18 항 에서도 밝히고 있듯
성서는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주석에 따라  각체의 문학양식과 기교를 고려하여 
해석하여야 하며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으로써의 성서의 권위를 인정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써는 각 책 이 가진 독특한 문화적 역사적 신학적 문학적인 성격을 
충분히 존중 해야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땅의 흙으로써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의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를 들으며 홀짝거리는 짧은 숨이 아니라 생명이 길고 
깊은 숨을 들이 마시도록 초청하는 책이 바로 성서 이다. 
이것이 성서 영감설 (聖瑞 靈感說) 이 우리에게 전달하여주는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 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성서 영감설과 늘 함께 거론 되는 주제는 성서 무오설이다 .
성서의 저자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기 때문에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 라는 교리 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권위에 때해 스스로 증언 하기도 한다. 
성서에 대한 종교 개혁자들의 강조가 인쇄술의 발전과 맞물리어
개신교는 유래없는 성서 중심적 신학과 영성을 형성 해 왔다. 


하지만 이는 안따깝게도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던 공동의 책으로써 성서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도 초래 했던 것이였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라는 개인이 홀로 신 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함께  그리스도인 몸인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와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유기적으로 연결 시켜주는 바울 선생의 가르침에 귀기울일  필요성이 있다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우리가 교회로써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공동체로써 “나”와 “너” 가 
서로를 통해 함께 듣는 것을 의미한다 .
개인주의 시대에서 간편화 축소화 디지털화 되어가는 성서의 흐름 속에서 
시대의 공동체 책으로써 의 성서 재발견 이 더욱더 중요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 의식속에 중요하게 자리잡을 필요성 있을 것이다.
다음장은 삼위일체 론이다  삼위일체론 셋 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 
흏륭한 설명이요 간단하면서도 안전한 풀이 방법이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핵심교리는 삼위일체이다 .
삼위일체론은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신안생활과 교회의 예배를 구성하는 근본 가르침 이자
역사의 흐름을 결정할 정도로 인류 문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쳐왔다. 
지금도 이 교리는 기독교를 기독교 답게 하는 기독교 인의 중심적인 교리로써의 
축을 담당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로 그러하다.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언어를 뛰어넘는 신묘막측 한 
사실이고 신비이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웨인 그루뎀이라는 사람에 의하면  구약은 삼위일체에 대해 
암묵적이고 부분적으로 계시한다면 신약은 더 확실하고 온전하게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그루뎀은 성서가 비록 삼위일체 교리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더라도 이 교리의 핵심 뼈대는 다음과 같이 제공 한다고 주장 한다.
첫째 하나님은 삼위 이시다 . 구별된 인격체로써 존재 하신다는 이야기 이다.
둘째  각위는 온전한 하나님 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하나 하나의 명제들이 논리적으로써 충돌을  매끄럽게 다듬어가는 쉽지 않기에.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의 지성의 수준에 맞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고 
그러다보니 세가지의 가르침 속에 균형을 잃게 됨으로써 신학적인 깊은 오류에 빠지게 되고.
심지어 이단에 빠져 헤아릴수 없는 언뚱한  심각한 오류 에 빠지게 된다. 
이런 것 들이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는  아니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부페하고 심각한 딜레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 론의 교리는 긍정적으로 전달하고자하는 바를 알아갈 때에  삼위일체 교리는 .
난해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를 햔하신 하나님의 복음 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가르침이요 역사하심 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언제나 인간의 언어와 논리를 넘어서고 있다 
이에 루이스 벌콥의 말에 귀 기울리자.
삼위일체는 그자체로써 신비이다.

인간이 그것을 이해 할수 도 없고 이해하게 이해 할수있도록 만들수도 없다

삼위일체의 관계나 드러내는 방식은 어느정도 이해할수 있겠지만. 그 본질 자체는. 
이해 할수 없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본질은. 교회가 제기할수 없는 어려움이다. 
하나님의 본질을 논 한다는 자체가 신성 모독죄에 속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교회에서 설명하고자 무척 많이 시도를 하였지만 
교회를 위협하게 되는 오류의 방식으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형성 하고자 했을 뿐이다.  
완전한 존재 로써의 너  완전한 존재 로써의 그 가 서로  완전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상호 보완적 관계로써의 주고 받음의 관계로써 또 하나의 완전한 존재''나'' 가  형성되어
그안에 서 흘러넘치는 기쁨 과 은혜로써 균형있는 관계적 상호 보완을 형성하고 
분리 없는 연합의 관계를 현성 하고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페리 코레시스적" 상호 보완 유대관계를 형성 하고 있음을 
서술 하고 있다. 
오늘날 에도 나를 중심 으로 “너”“ 나”“그” 의 투명성을 공정시 할때에도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이루어져가는 현실속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수가 없다  
이와같이 삼위일체적 세계는 삼위 일체적인  삶 자체는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세계를 (天國 ) 말하는 것이다.

 

유진피터슨 은 하나가 셋 과 같다 라고 하는 숫자놀음의  차원에서는  절대 삼위일체의 
신묘막측한 범위를 이해할수 없다고 말한다 .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 보완 서로 사귐 의 관계 페리코레시스적  서로 연합 의 
관계에서 시작 되는 것이고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활동 속에서 각자의 삶을 발견할수 있어야 되고 그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 이자 지향점 이 되어야 한다 라고 
설명 하고 있다.

 

계시란 어원적으로는 “나타냄”“드러냄” 이라는 뜻으로써 인간의 스스로 계시를 발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하여 수동적인 신적 지시를 받은 것을 말한다.
같은 종교라도 믿는 방식이 꽤나 다를수 있음을 종종 알게 된다. 

설교공부를 하고나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을수있으나   설교자나 
강사가 제 아무리 휼륭해도 구약의 예언자나 신약의 사도와 동급 이 될수는 없다. 
시인들도 나름의 계시를 받을수 있다라고 할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영적 계시는 시인들의 나름 계시와는 본질적으로 영적으로 
차원이 틀릴수 있으므로 한번더 생각을 하여 말 하는 것이 계시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알아 내는 또 하나의 방법일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흔히 "계시의 종교" 라고  부른다 . 
그리스도 교의 신학에서 '계시'란 무엇일까.  그리스도 적 의미에서 계시란 무엇인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논의를  삼위일체 론에서부터 시작 해야만 하고  그다음에 계시의 중요성과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누구신지 계시와 성서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 핵심주제도 
적적하게 다룰수있게 된다 .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으로 
하나님께서 는 나사렛 예수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온전히 들어내셨다 . 그리고 성서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안에”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계시론은 삼위일체적 구조를 기지고 있다.


계시론을 삼위일체적 맥락에서 본다면 계시는 무엇보다 더 신비하신 하나님 께서 자기를 주심 
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기로 하신 “임마누엘 의 사건” 이라 볼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거칠게 요약 하자면 성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과는 동일 하지 않는 다는 것이 핵심 내용 이며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이기에 인간되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려지는 것일까?
정보전달의 그이상  그렇기에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런 저런 분이시다 라는 고급 교양 정보기능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참된 자유자로써의 신앙는 그것보다 훨씬더 급전적이고 총체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은 이 세계를 이전과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었으며 인간의 고귀함을 
새롭게 보여주는 한편 그것을 “바울의 창조” 라고 불렸다. 
즉 예수구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한마디로 우주의 흐름을 바꾸고 인류의 
역사를 전환 시키는 은혜의 사건 이다 .


세상과 나 에 대한 참 그리스도 적 지식은 이 변화적인 사건에 기초하게 된다.

세상 우주의질서 자연의 아름다움 문녕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보편적 도덕률 등 이 세계가 
무 작위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고도로 지성적이며 선한 존재로부터 나왔음을 간접적으로 
증언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만드셨고 우리를 향한 구원을 사역을 피셨고 세상을 창조 하셨으매 우리에게 만든 것이 세상 창조 이므로 세상을 우리에게 제공 하는 것이다.


이에  모든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집이되며  우리는 하나님 집에 거하는 피조물인 것이다.
고로우리는 하나님의 소통을 원하는 존재요 소통 가능한 존재요 소통의 근원적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존재 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의 여러 구절 에서도 일반계시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는 하나님 께서는 인간의 생각의 틀과 언어를 사용해서 이처럼 자기를 알리시는 특별하고도 구체적인 계시의 매개체 이다.
 
특별 계시의 장점은 성육신한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이다.

 
옛적 선지자를 통하여 여러부분과 여러 모양으로써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 하신 하나님의 
이 모든날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 하셨으니 하나님의 존재의 흔적이 
자연을 통하여서 ‘모호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지 는 성서를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나타내신다. 

 

이처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모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알게되는' 중요한 통로' 이고
전통적으로 하나님 께서는 인간에게 두권의 책 ‘성서’ 와‘ 자연의 책’을 주셨다고 표현 해왔다.   표현 하고 있다.

바르크는  자연은 그자체로 신학의 재료나 주제가 될수 없음을 강조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빛 아래서만 참 의미”가 드러날 수 있음을 강조 한다.
즉 자신을 예수그리스도 성령 안에서 계시하는 하나님 (성부) 은 계시를 올바르게 해석   
 해주시는 하나님(성령)이시기도 한다.

 

다시말해 여기서도 하나님은 그자체 로 삼위일체론 적임을 (페리코레시스)적 성령님을 
만나볼수 있는 계기가 된다 반드시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령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빛을 밝혀주셔서 어둠속에 가려졌던 크고 넓은 실체를 보게 
해 주신다 그것은 성서가 증언 하듯 하나님 께서 주인이 되신곳 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한 세계이다.

 

 하나님 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그 낮선 세계속에서 ‘나란 존재’를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진정한 나의 인식과 행동의 주체라는 안전지대 로부터 끌어내어   
말씀의 청취자로. 빛어 내신다 .
 그리고 하나님 께서 주신 성서를 통해 우리는 그 새로운 
미지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삶을 이해하는 언어를 습득 하여 간다 .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  하나님과 구원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으로 깊이 알아들어가야 되는 가장 큰 맥락의 전제에서부터 왜곡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밀러- 화이트는  하나님에 대해 배워 가도록 사용한 언어인 불변, 지혜, 사랑, 등의 신학적 
언어로 속성 (屬性) 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신학 속성 들이 성서에서 발견 되지만 그중에는 다소 철학적인 
(哲學的인屬性) 속성 들이 있다. 

전지의 대표적인 예로 자비, 아름다움, 선함, 지혜, 공의, 등을 꼽을수 있다면 후자로써는 
단일성, 부동성 무 감정성이 있다. 
하나님의 대한 잘못된 이해로 빠지지 않기위해 속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집중 하고자 한다 성서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소개 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불멸성)이 있으며 기까이 가지 못하는 빛에거하시고 (영광)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고 또한 볼수 없는 이 
(비 가시적인 존재) ㅡ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볼수가 없다 
에덴 동쪽에 거하는 인류의 시야에 절대 자는 포착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는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경고 한다.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격적인 관계를 너-나 라고 표현 했다. 
내가 아닌 것과 대부분의 관계는 나-그것 it 의관계이다 이때 ‘그것’은 ‘나’ 인식의 대상이되고  
‘나’는‘그것’의 관찰자가 된다 반면 ‘너’의 대한 지식은 대상화도 객체화도 될 수 없는 인격적
이고 상호적인 특성을 가진다.

 

부-버는 다음 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너’ 라고 말하는 경우  그 말을 건넨 사람은 대상(對象)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
인격적 관계에서 지식을 얻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고 타자의 현존을 인정하는 인내가 필요 하고 자가의 편견과 편리를 포기하는 고통을  요구 한다 이런 불편 때문에, 우리는 흔히 대상에 대해 아는 데서 만족하곤 한다  사람됨의 특징을 묻지 않고 추상적 숫자에 집중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꼬집는 어린왕자의 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근원적인 나-너 관계가 형성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관계가 자칫하면 ‘나-그것’ 의 관계로 변질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머리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증식 시킬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偶像 崇拜) 와도 같다  왜냐 하면 
인격적인 하나님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그것(it) 들중 하나로써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언어로써 표현 할수 있을까.

 
하나님의 속성141 p > 에서는 자존성 불면성 비가시성 완전성 영원 편재 전능 전지 통일성을 
비 공유적 특성으로 분류 하였고 나머지

 영적성품, 질투, 선하심, 자유, 지혜, 사랑, 자비, 거룩, 평화, 의, 진실함, 진노, 의지,
 복되심. 아름다움, 영광, 등을 공유적 속성으로 정리 표를 만들어 놓았다 참조 141 p >
 인간의 몸을 지니고 물리적 시공간 안에서 살아가고 또 이세계가 완전히 구속된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창조와 떼려야 땔수 없다  하나님 께서는 창조와 구원을  하셨고  그 창조와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인 선하심. 아름다움. 공의. 지혜. 자비, 등은 인간에서도 어느정도 나타나는 특성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간과 함께[ 가지고 있는 속성을 공유적
속성 이라고 부른다.  
반면 영원 부동 전능 등은 인간에게 없는 특징들이다. 히지만 우리는 이런 속성들이 무엇인지 
성서를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경험하는 오랜 지속함  공간을 차지함 거대한 권력등을 추상화 하면서 그 뜻을 부분적으로 파악할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 에게 있고 인간에게 없는 속성을 ‘비공유적 속성’ 이라고 부른다. 
  
공유적인 속성과 비공유적인 속성의 구분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자 
만들었다 이둘을 구분하는 방식은 신학자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에 특정 구분법 자체를 
절대화 할 필요성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정 속성이 공유적인지 비 공유적인지를 따지는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근본 적으로 유비적 
이라는 사실이다  속성의 언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신뢰할만한 정보를 전달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의 경험과 뒤섞이며  참 하나님의 모습을 가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매우 매우 중요한 표현 이다.

 

예를 들면 성서의 언어는 하나님을 아름다운 분으로 소개하기에 인간은 자기의 의식속에 있는   미(美)에 대한 정보를 활용하여 하나님을 파악하게 된다 .
서양 그리스도교.  미술사에 있는 서구 유럽식 미남을 묘사해 호감을 살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꼭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물리적인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또 이세계가 완전히 구속된 세계가 아닌 이상  하나님의 전능은 창조와 떼려야 땔 수 없다.... 
만약 전능의 개념이 창조자 하나님의 대한 신앙과 분리되면  성서의 하나님이 아닌 거짓 신이우리마음 속에 자리잡게 될수도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피조세계의 본질과 질서를 만든 창조의 힘이지만 시시각각의 본질과  질서를 바꿀수 있는 변덕 면허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신학자들은 전능은 하나님께서  자기당착적인 일어나 논리적으로 모순된일을 하실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해왔다.
즉 전능은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신뢰의 인내를 통해서 작용하는 
힘  이라고 볼수 있다.

하나님 께서는 자신을 성서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셨다 따라서 
성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끝없이 우상을 들어내는 인간의 욕망이 심판 받아야할 
지점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게되는 근원적인 장소 이다.

 
하나님의 성서와 무관하게 추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철학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다보면 하나님의 속성론은 인간이 억압하고 햡박하는 교리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고귀한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우리가 속한 이세계가 부담스러워 하고 바라지 않고 심지어 조롱까지 
하는 존재가 될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성서는 하나님의 속성에 정의와 평화와 
생명과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실로 그러하다. 
이세상에 속하지만 속하지 않는 특이한 존재가 되라고 우리를 초청하는 하나님의 속성론은 
중요하고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참 불편한 교리이기도 하다.

 

 

다음은 창조론 이다 생명을 불러내는 하나님의 말씀 이 거대하고 신비로운 삶의 터전인 우주를 만드신 분을 그리스도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 고백한다 정희성씨의 짧은 시 를

소개한다

한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목한 솜털 돋는 생명을 가슴속에 불러내내 사랑해

솜털돋는 생명이란 –생명의 씨앗과같은 사랑해 결국 이말을 하기 위해 ‘창조’ 했다라는 것

그대 귓가에 닿지못한 한마디 말 중에서 ------

성경속에는 과학정보가 0% 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 구체적인 과학의 어떤 정보도 없다

는 것이다

시간적인 개념 도 마챦가지 태초라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할시 long lomg a go 라는 개념이아니라 이개념은 인간의 관점에서 볼때의 개념인것이고 그 이전의 개념 시간이라는 개념을 서 기전에 부터의 시 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간 조차도 당신이 만든것이오니 당신이 만드시기 이전에는 아무 시간도 지나갈수 없습니다

시간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창조이전에 하나님 께서 무엇을 하셨느가 라는질문은

그 자체가 성립할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 이라는 틀 속에서 대상을 파악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시작되는 태초의 창조를 제대로 알길이 없다는 것

 

오히려 창조의 이해를 설명하려는 순간 일상을 지배 했던 논리와 언어의 한계가 적나 하고

설명하려는 순간 일상을 지배했던 논리와 언어의 한계가 적나라 하게 노출 된다는 것 이다

공동번역 성서도 ‘태초’대신‘한처음’ 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창조가 우리가 이해하는

물리적인 시간과 질적으로 다른 시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을 강조 한다

따라서

창조에대한 우리의 지식이 희미하다는 것은 부끄러워 하거나 당황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

오히려 창조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 한처음’ 에 일어난 신비를 역사속의 사건중 하나쯤 으로 단숭화 시켰을 위험이 있다라고 의심해 볼만 하다 즉 다시말해

창조를 설명 할 때 ‘창조과학’ 이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창조는 과학으로써 절대 증명할수 없으며 증명 되는 순간 ‘추락’ 하고 만다는 것 이다

창조를 하나님께서 행하신는 모든 것들은 절대‘인간의 범주’에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결론 에 이른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해석학적 전제’

이다 는 말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절대로 과학으로는 불가능 하다 라는 것 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 께서 유한한 인간 특별히 근대 과학이

발전하기이정의 인간들을 위해 ‘특별한 방식’ 으로 우주의 기원을 알려주는 ‘결과물’

 

창세기는 그 자체로 완결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 신앙속에 성숙하고 자라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답고 지혜롭꼬 권위 있는 설명이다 또한 창세기는 인간의 인식과

언어의 수준까지 자신을 나추신 하나님의 ‘겸손’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성령의 빛에 따라 창조의 신비를

배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매우 독특함 인 동시에 기독교의 아주 독특함이다

창조는 영원하고 유일하신 하나님 께서 하신 일이라는 점 이다

창세기 1:1의 ‘테초의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의 히브리어 원문에서의 Bara 동사는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만을 주어로 하는 데 쓰인다

즉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으시는 고유한 사역을 강조하는 샘이다

둘째 이 세계는 어떤 재료로 만드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창세기는 기록한다

 

창조주는 존재 하기위해 피조물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말씀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따라서 말씀을 통한 창조는

한편으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매우중요한 말이다

 

셋째 하나님의 창조는 선한 것이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창조 때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진 것이 무엇일까 말씀 말의 능력 언어 라고 할수 있다

경탄의 언어가 고발의 언어로 바꿔졌다

쉽게 결론을 말하자 예수를 맏으면 경탄의 언어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

언어의 타락성 이 언어의 회복성으로 바뀐다는 것 매우매우 강조 하는 대목이다

언어의 타락성을 이야기하면서 경탄의 언어의 회복을 강조 하고 있으며 말은 곧 불(化)

이요 날카로운 비수 (匕首) 매우 매우 날카로운 칼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이다

 

부활은 새창조의 출발이자 시작 이다

부활은 죄와죽음으로 규정되던 옛 세계의 질서가 무효화 되고 생명의 질서가 들어오는

대사건 이다

 

옛세상의 죽음을 넘어서는 새 세상의 출발 이것이 부활 인 것이다

부활이라는 언어상의 깊이로써도 상당히 깊음을 알수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그리스도인은 태초에 있었던 창조를 믿는 데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함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새 창조의 질서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다 창조론을 이해하는 데 핵심은 열린 창조에 있다는 것이다

 

창조론은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하늘과 새 땅은 어떤곳인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는 과연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참으로 신비롭고 실제적인 가르침 이다 따라서 창조론이 하나님의 창조 방식과 그분이 만드신 세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긴 하지만 창조론은 창조에 관한 (about) 교리를 황원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창조론이라 함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교리 이자 인간과 세계의 목적에 관한 가르침

거기 까지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창조 이야기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경의만이 아니라 물리적 조건과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는 꿈을 잉태하게 하는 신앙의 위대함에 대한 경의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행복하게 될 수 있는 피조물도 원래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므로 자기에서 행복을 얻어낼수 없으며 자기를 창조해주신 창조 주에게서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섭리론 으로 넘어가자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

 이현령 비현령 [耳懸鈴鼻懸鈴.교리(?)>>> 즉  귀에걸면  긔걸이 코에걸면 코걸이 ...
과연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만큼 신학자나 목회자가 풀어내기 힘든 주제는 드물다고 한다
과연 세월호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 세월호 사건은 하나님의 뜻 이 될수 없다 
하나님의 뜻과 세월호 사건(?)은 근원적 이야기부터 어긋나는 이야기 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일까  어떤전공이나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일는지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일까  이 고통과 시련 이면에 숨은 뜻이 있을까  하나님의 뜻에 맞는 부동산 투자가 있을 가 ? 전쟁과 식민지배도 하나님의 뜻인가 ?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을 잘 구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심은  하나님의 큰 민족을 이뤄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나가는 것 
-> 개개인의 복 과는  개념자체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 은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역사라는 모호한 틀에서 살고있는 마음의 좌와 욕망으로 혼탁해진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고 해도 의지가 약해 그분의 뜻에 
맞추어 살기도 쉽지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와는  무관할 정도로 신비하고 고결한 
그 무엇인가 ?  인간이 하나님의뜻이 무엇인지 모른채 그분에 따라 살아야만 하는 비극적 
운명을 안고 있는가 ?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질문의 굴레를 잠깐 벗고  하나님 뜻에 대한

성서적 이해에서부터 시작 해보자

 

하나님은 인간을 숨겨진 신의 의지를 찾으려고 강박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창조주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자유롭고 개성있는 존재로 각자를 만드셨기에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한가지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에 전햐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도 거기서 기쁨을 얻는 것과 유사한 법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성서는 궁극적인 맥락에서 ‘하나님의 뜻’ 이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신앙고백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기에 문제가 생긴다 성서는 ‘하나님의 뜻’이 악과 고통의 
원인 이라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신학자 레슬리 웨더 헤드의 주장에서는 역사라는 것은 모호하고 복잡 하기에 
프리즘을 통과시키면 여러 색으로 나뉘어지듯 하나님의 뜻 역시 역사라는 곳에서 분산되어
다양한 형태로 나뉘게 된다라는 뜻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신학자 웨더헤드 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의도적인 뜻 상황적인 뜻 
궁극적인 뜻으로 프리즘을 통과하여 3가지 유형으로 나뉘게 할 수 있다 
의도적인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처음의 계획으로써 아주아주 분명하고 선명한 계획을 
상황적인 뜻은 항상 열려져 있다는 하나님의 뜻을  
궁극적인 뜻은 분명히 실현 시킨 것 실현 한 것 이라고 간단히 설명 할수 있겠으며 
이 차이를 잘 구별 하는 힘이 필요로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적인 뜻 상황적인 뜻 궁극적인 뜻을 “균형감있게” 고려하면 아무리 악한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혼란과 고통 속에 있더러도 하나님의 마련한 길을 찾으면서 걸을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 시키는 것 상당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으 따라 살아갈것인가 ?
우리의 인생 여정을 비유하자면 우리는 종착지에 이룰 때 까지 그뜻을 온전히 알수가 없다
심지어 성서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으로써는 알 수 없는 ‘신비’이며 우리의 기대 와는
정반대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낮선 길을 가고 있더라도 종착지로 
인도 해줄 표지판이 중간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과 갯세마네  기도의 핵심은 ‘나의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춤으로써 하나님 의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구 이다.

하나님의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요약하는 말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깊이를 더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길임을 성서는 알려 준다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그 뜻
대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 하셨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 하느자 가 천국에 들어간다. 라고 말씀 하셨으며  심지어 피와 가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 라고 ’ 하셨다


성서는 역시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라 고 말하신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의 관계를 ‘땅따먹기’ 식으로 생각 한다 
땅따먹기 놀이를 할 때 한정된 땅에서 상대가 나보다 더 많은 영토를 가지면 그만큼 내가 
가질 수 있는 영토가 줄러드는 것과 마챦가지로 하나님의 뜻이 차지하는 바중이 클수록 인간의 자유의 영역이 줄어든다라고 상상히기 쉽다 .


인간의 자기의 뜻에 따라 자유를 행사 하며 사는 것을 자율(自律) 로 인간이 하나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타율(他律)이라고 단순화 시켜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유(自由)는 인간의 근원(根源) 이 되었고 즉  하나님이  삼위일체(三位一體) 이듯이 하나님 의 뜻도 전적으로 삼위일체 적이며 인간의 자유도 삼위일체적 틀 (三位一體的 ) 안에서 바로 이해 될수 있다 

우선 창조자이자 섭리자오서 ‘성부’의 영원한‘뜻’ 이 있다 유비를 찾자면 


성부는 극작가(劇作家)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역사(歷史)의 중심이신 성자는 극에서 
주인공에 해당된다 하지만 극작가가 주인공 만으로는 극을 완성하지 못한다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려면 휼륭한 조언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는 것이 인간 (人間)이다
역사 속에서 의 감독의 역할은 하는 것이 성령(聖靈)이시다 라는 것이다

극작가-주인공-감독 은 삼위일체에 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비유로 여전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삼위일체론적인틀 은 어떻게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맞출수있을까 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 
휼륭한 감독을 만난 배우자가 자신의 맡은 역할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듯 성령은 각자가 지닌 
고유성(固有性)을 발견하고 개발(開發)하도록 도우시고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더욱더 큰 틀에서

 풀어낼수있도록 이끌어주신다
경우는 첫째 고통에 순간을 직면(直面)할 때이고 둘째 중요한 중대사(重大事)를 앞두고 있을 
때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비(神祕)가 우리의 질문과 호기심에 대한 답으로 쉽게 번역되어버릴 
위험성(危險性) 이 있어 하나님의 뜻은 귀에걸면 귀걸이요 코에걸면 코걸이(耳懸鈴 鼻懸鈴)처럼

우리에 필요에 따라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바이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는 그분 의지의 은혜(恩惠)로운 
표현(表現)이다  그렇기에 우리도 일상에서 경험하게될  어떤 구체적(具體的)인 사건을 
하나님의 뜻 이라고 부르는데 조심하여야만 합니다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고 
안달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 우리의 뜻에 하나님의 뜻이 
임할 때 나와 공동체(共同體)는 폭력(暴力)과 혼돈(混沌)과 우울함에 물든 사회(社會)속에서
하나님의 의지가 임하는 평화(平和)의 지성소(至聖所) 가 될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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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병선 2018.10.25 18:23
    엽산님, 열심히 읽고 정리하느라 애쓰셨습니다.
    이런 공부들이 쌓여서 깊이 있는 믿음의 자리로 들어갈 것이라 믿습니다.
    계속 매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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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 안녕하세요?선교사님! 박성재 2016.03.21 1592
791 칼 바르트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정병선 2016.03.12 1416
790 네팔에서 강대권 선교사 강대권 선교사 2016.03.11 1413
789 교회력에 따른 절기와 상징 색 김혜란 2016.01.13 1699
788 주현절의 의미 1 김혜란 2016.01.13 1725
787 빵집일기2- 예쁜 정화 2 김혜란 2015.12.18 1621
786 빵집일기1-미역국을 끓이는 상철이 4 김혜란 2015.12.08 1469
785 세상에 이런 일이 13 정병선 2015.10.15 1142
784 김지영/김희수선교사(캄보디아)의 선교편지 2 송희곤 2015.09.27 1594
783 커피 한 잔 대신 아프리카에 꿈을.. 1 김혜란 2015.09.11 1369
782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김혜란 2015.09.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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