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logo

서브이미지
subtitle
2018.08.10 08:48

감사의식과 채무의식

조회 수 7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세 가지 진실에 눈떴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진실.

나의 모든 행위는 죄에 물들었다는 진실.

세상만물은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진실.

 

이 진실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세 가지 의식을 일깨워주었다.

피조의식. 죄인의식. 선물의식.

물론 일부러 이런 의식을 하며 살지는 않는다.

단지 매순간 공기에 둘러싸여 살아가듯이 세 가지 의식에 잠겨 살아간다.

매순간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세 가지 진실을 거듭거듭 확인하며 살아간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그리스도인치고 세 가지 의식에 눈뜨지 않은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여, 나는 이 세 가지 의식을 ‘그리스도인의 3대 의식’이라고 말한다.

세 가지 의식 중 하나라도 깨어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여긴다.

아니, 세 가지 의식 중 하나가 깨어나지 않는 일은 애당초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신 것처럼 세 가지 의식은 셋이지만 하나의 의식이다.

세 가지 의식의 형태는 다르나 하나의 의식이며, 하나의 의식은 세 가지로 존재한다.

 

여기서 세 가지 의식의 상관성을 논하진 않겠다. 선물의식에 대해서만 잠시 논하려 한다. 선물의식에는 감사의식과 채무의식이 뒤따른다.

모든 것이 선물이라는 진실에 눈뜬 자는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생각해보라.

날이면 날마다 하나님이 베푼 선물에 파묻혀 사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또 한 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진실에 눈을 뜨면

받은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고,

그마저도 아무 한 것 없이 거저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며,

이 놀람은 자연스레 채무의식으로 연결된다.

나는 빚진 자라는 채무의식으로.

 

그러니까 감사의식과 채무의식은 선물의식이 낳은 쌍생아다.

얼핏 보기에는 감사의식과 채무의식이 전혀 다른 것 같아 보이고,

완전히 상반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선물의식의 쌍생아다.

감사의식의 이면이 채무의식이고, 채무의식의 이면이 감사의식이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보라.

그는 감옥에 갇혀서도 기뻐했고, 말할 수 없는 환란 중에도 감사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했다(살전5:16,18).

동시에 나는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했다(롬1:14).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15:10).

감사의식과 채무의식이 가히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혼연일체 된 두 의식이 바울의 삶을 관통하며 추동한 원동력이었다.

 

현대인은 다르다. 현대인은 대부분 권리의식으로만 무장되어 있다.

채무의식 없는 권리의식이 삶을 관통하며 추동하고 있다.

그 결과 곳곳에서 나의 권리와 너의 권리가 충돌한다.

갑과 을이 충돌하고, 을과 을이 충돌한다.

시장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다. 광장에 나가보라. 자기 권리를 찾겠다는 아우성이 그치지 않는다.

물론 인권은 소중하다. 인권은 보호받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우리사회에는 아직도 인권의 사각지대가 많다.

우리의 생각과 습관화된 일상에도 인권의 사각지대가 많다.

우리의 인권의식은 더 깊어져야 한다.

 

그러나 채무의식 없는 권리의식으로는 생명과 평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생명과 평화의 세계는 오직 혼연일체 된 감사의식과 채무의식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세상만물이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진실을 아는 자는

이미 일상에서 생명과 평화의 세계를 살아간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세상에 없는 생명과 평화의 세계를 세상 안에서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