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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영광은 [시는 어떻게 오는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오류지만,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초능력일 것이다.”

 

가히 시인다운 통찰이요 번득임이다. 맞다.

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말하는 오류를 범하는 자들은 거리마다 차고 넘친다.

특히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가운데 말의 오류를 밥 먹듯 하는 자들이 많다.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폭력을 행하는 자들도 거리마다 차고 넘친다.

특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 유권자의 귀를 현혹하는 정치인들 가운데

말의 폭력을 쏟아 붓는 자들이 많다.

 

반면에 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능력을 구사하는 자들은 소수다.

만물과 만사를 깊이 들여다보는 몇몇 시인들.

평생 땅과 마주하며 늙은 몇몇 농부들.

그리고 몇몇 정직한 철학자들 정도.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하는

어떤 종류의 초능력을 구비한 자는 더더욱 소수다.

아니, 이것은 애당초 어떤 종류의 초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으로 말미암은 은총일 뿐.

사실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통해서만 세상의 어둠을 본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통해서만 이성의 어둠을 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통해 어둠을 본 자만이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는 극히 드물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통해 어둠까지 본 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빛을 본 것으로 다 보았다고 생각한다.

빛만 본 자는 계시의 빛을 제대로 본 게 아닌데,

어둠까지 봐야만 비로소 제대로 보는 것인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빛을 본 것으로 다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여,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언어의 폭력을 행한다.

진리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으로.

어둠을 보지 않는 것이 또 다른 무지임을 모른 채로.

 

말만 그러는 건 아니다. 듣는 귀도 똑같다.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폭력에 환호하는 자들은

교회마다 광장마다 차고 넘친다.

반면에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하는 은총에 귀 기울이는 자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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