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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깊어지면

2019.11.10 16:16

정병선 조회 수:185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마태복음5: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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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이 좋은 것과 깊은 것

 

우리는 아주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교회 예배와 여러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 세상일보다 하나님 일에 더 열심인 사람, 세상의 크고 작은 시련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 항상 긍정의 힘이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 참 신앙심이 깊다’는 말을 합니다. 예,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좋은 것’과 신앙이 ‘깊은 것’은 비슷한 듯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앙이 좋은 것’과 ‘신앙이 깊은 것’을 굳이 구별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좋은 것이나 신앙이 깊은 것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좋은 것과 신앙이 깊은 것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신앙이 좋은 것과 신앙이 깊은 것은 비슷한 듯 다릅니다. 겉만 보면 비슷한데 속을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2. 예수와 유대인들

 

예수님과 유대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연이어 모세 율법에 대해 파격적인 해석을 합니다.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는데 예수님은 문자에 갇히지 않고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확대 해석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도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육체적 간음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데 예수님은 문자에 갇히지 않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확대 해석했습니다.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가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말씀도 유대인들은 문자대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데 예수님은 문자에 갇히지 않고 “헛맹세만 하지 말 것이 아니라 맹세 자체를 아예 하지 말라. 하늘로도 하지 말고, 땅으로도 하지 말고,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확대 해석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도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는데 예수님은 문자에 갇히지 않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해석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도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는데 예수님은 문자에 갇히지 않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도 모세 율법을 믿었고 유대인도 모세 율법을 믿었는데 해석은 이처럼 달랐습니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요? 같은 문자를 읽었는데 왜 이렇게 이해와 해석이 달랐을까요? 그것은 보통의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이해한데 반해 예수님은 문자의 차원을 과감하게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문자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자는 하찮은 것이라며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 똑같이 문자를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온전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문자에 갇히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문자를 통해 문자 이상을 읽었습니다. 문자만 읽은 게 아니라 문자가 가리키는 더 큰 진실을 읽었습니다. 한 마디로 읽는 방식, 읽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읽은 반면 예수님은 문자 이상을 읽었습니다. 이처럼 읽는 방식, 읽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똑같이 모세 율법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와 해석이 달랐던 것입니다.

 

3. 문자의 한계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문자에 매이지 않고 문자 이상을 읽었을까요? 유대인들처럼 문자대로 읽지 않고 문자 이상을 읽었을까요? 그것은 문자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문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선물입니다. 인간이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나 놀라운 문명과 문화를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문자 덕분입니다. 문자 덕분에 앞선 세대의 지식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오늘과 같은 과학문명을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문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근원 진실의 깊이를 담기에도 한계가 있고, 하나님 말씀의 오묘함을 담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중국의 노자는 2500년 전에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도를 도라고 하면 그 도는 본래의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무슨 말입니까? 도(道)라고 하는 것은 문자보다 크고 깊다는 말입니다. 문자 나부랭이로는 절대로 도를 담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도는 문자보다 크고 깊기 때문에 도를 문자로 말하는 순간 그 도는 도가 아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도(道)를 거들먹거릴 것까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쏟아내는 말만 해도 제대로 들으려면 새겨들어야 합니다. 말만 들어서는 안 되고 억양이라든지 얼굴 표정이라든지 언어습관까지 이해하며 들어야 하고, 말 속에 담긴 의미를 헤아리며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은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한없이 깊고 오묘하고 역설적이고 무한한데 이처럼 깊고 오묘하고 역설적이고 무한한 말씀을 문자대로 읽어 가지고 되겠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단지 ‘살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으면 되겠습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단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뜻으로 읽으면 되겠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단지 ‘살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말씀을 완전히 잘못 읽는 것입니다. 그것은 껍데기만 읽는 것이지 속까지 읽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자 너머까지 읽고 또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까지 헤아리며 읽어야 비로소 속까지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세 율법을 문자대로 읽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문자대로만 읽으면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니까 제대로 읽기 위해서 문자대로 읽지 않고 문자 너머까지 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까지 헤아려가며 읽은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마땅히 그랬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문자대로 읽지 않고 문자 너머까지 읽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까지 헤아리며 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지 않았습니다. 초등학생이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그저 문자대로만 읽었습니다. 문자대로 읽고 문자대로 이해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문자대로만 열심히 읽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단지 ‘살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었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도 단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그러니 신앙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문자대로만 읽으면 신앙이 강화될 수는 있겠지만 신앙이 깊어지지는 않습니다. 문자대로만 읽으면 세월이 갈수록 문자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신앙, 유치하고 딱딱한 신앙, 사람을 정죄하고 옥죄는 신앙,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신앙이 될 뿐입니다.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문자대로 열심히 읽었는데 저들의 신앙이 어떻게 됐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 않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을 정죄하고 죽였지 않습니까?

복음서를 보십시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영적으로 갈등하고 대립한 시간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신앙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신앙이 좋은 이들과 사사건건 논쟁하고 대립했습니다. 매순간이 긴장이었고, 매사가 대립이었습니다. 신앙이 좋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욕했고(마11:19), 예수님은 신앙이 좋은 유대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욕했습니다(마23:27). 그러다가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4. 신앙의 관건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신앙과 예수님의 신앙은 같은 신앙일까요 다른 신앙일까요?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모세 율법을 믿으니까 같은 신앙인 걸까요? 예, 겉으로만 보면 같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같은 신앙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저들의 신앙은 비슷한 듯 달랐습니다. 함께 손잡고 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달랐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나 유대인이나 신앙의 근본 바탕은 똑같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을 경외했고, 예수님과 유대인 모두 모세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따랐으니까 신앙의 근본 바탕은 똑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비슷한 듯 달랐습니다. 함께 손잡고 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달랐습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신앙의 근본 바탕은 분명히 똑같은데 왜 매순간 서로 긴장하고 매사에 대립하는 신앙으로 달라진 것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 말씀을 읽는 방식, 읽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문자대로 읽었고 예수님은 문자 이상을 읽었기 때문에 똑같이 모세 율법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와 해석이 달랐던 것이고, 이해와 해석이 다르니까 신앙도 달라진 것입니다. 예,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신앙이 갈라진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 문자대로 읽느냐 문자 이상을 읽느냐, 이것 하나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니까 신앙이 달라진 것입니다.

오늘도 똑같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하나님, 같은 성경 말씀을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신앙이 제각각 다릅니다. 목사마다 비슷한 듯 다르고, 성도마다 비슷한 듯 다릅니다. 심한 경우에는 함께 손잡고 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다릅니다. 저 사람과 내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다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경을 읽는 방식, 읽는 차원이 다르니까 해석이 다른 것이고, 해석이 다르니까 같은 성경 말씀을 믿어도 신앙이 다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의 관건은 신앙이 뜨겁냐 차갑냐일 수 없습니다. 확신이 강하냐 약하냐일 수 없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냐 안 지키냐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 이것이 신앙의 관건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색깔이 달라지고, 신앙의 내용이 달라지고, 신앙의 깊이가 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니까,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신앙의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해야 합니다.

 

5. 나의 목회적 소명

 

제 신앙의 여정을 돌아보면 감사하게도 신앙이 좋아지는 쪽으로 걸어오기보다는 신앙이 깊어지는 쪽으로 걸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한 번도 성도들의 신앙을 뜨겁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확신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교회의 전통을 잘 지키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 가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것만 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된다고 믿고 항상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눈을 열어 가는데 초점을 맞춰 목회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신앙이 좋게 하는 것보다는 신앙이 깊게 하는데 목회의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된 목회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목사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소명은 다른 게 아니고 성경을 제대로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 신앙이 좋아서 해롭고 위험한 신앙

 

저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유대인들의 신앙, 특히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신앙이 좋은 쪽’에 속하고, 예수님의 신앙은 ‘신앙이 깊은 쪽’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사와 성도들은 대개 신앙이 깊은 것보다는 신앙이 좋은 것을 선호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말한 대로 아주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교회 예배와 여러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 세상일보다 하나님 일에 더 열심인 사람, 세상의 크고 작은 시험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 항상 긍정의 힘이 넘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높이 추켜세웁니다.

또 성경 말씀을 문자대로 믿고 문자대로 열심히 따르는 사람을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봐라, 6일 동안에 창조를 다 마쳤다고 하지 않았느냐,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 미워하지 말라고까지 말하지는 않았지 않느냐,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했지 않느냐,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그러니 진화를 인정하면 안 된다, 미워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여자는 교회에서 설교하면 안 된다, 주일에 예배를 빼먹으면 안 된다, 라고 믿고 그대로 행해야 신앙이 좋다고 하지, 이 말씀이 말하는 게 뭘까, 정말 성경이 말하는 대로 6일 동안에 다 창조했을까, 라고 의문을 품으면 ‘너 신앙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고 윽박지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을 문자대로 읽고, 문자대로 이해하고, 문자대로 믿어야 신앙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바로 이런 사람들,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신앙이 없는 자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문자대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 죽였습니다. 특히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앞장서서 죽였습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보통의 유대인들보다 훨씬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라고 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이고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교회 역사를 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마녀사냥이 일어났고,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종교 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치의 광기가 일어났고,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남북의 화해가 저지당하고 있고,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한국교회가 독선적이고 편협하고 무례한 집단이라고 매도당하고 있습니다. 매우 안타깝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복음서를 보나 이천 년 교회 역사를 보나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자들이 극악무도한 죄악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신앙의 이면입니다. 우리가 소위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신앙은 말 그대로 ‘좋은 신앙’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해롭고 위험한 신앙일 수도 있고, 독선적이고 편협한 신앙일 수도 있고, 외골수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신앙이 좋은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또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신앙이 좋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이 좋기만 하면 위험합니다. 신앙이 좋기만 하면 신앙으로 산 세월이 오래될수록 독선적이고 편협한 신앙, 삶을 갉아먹는 해로운 신앙, 예수를 죽이는 위험한 신앙으로 뒤틀리기 쉽고, 눈 먼 소경이 되기 쉽기 때문에 신앙이 좋기만 하면 매우 위험합니다. 신앙은 시간과 함께 깊어져야 합니다. 시간과 함께 깊어져야 편협하고 독선적인 신앙, 해롭고 위험한 신앙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고, 눈 먼 소경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7. 좋은 신앙에서 깊은 신앙으로

 

그렇다면 신앙이 깊다는 것은 뭘까요? 신앙이 깊다는 것은 우선 믿음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일에 열심인 것도 아닙니다. 몇몇 신앙 공식(교리)을 목숨처럼 붙잡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만을 외치는 믿음 절대주의나 신앙의 세계에만 몰두하는 신앙 외골수는 더더욱 아닙니다. 신앙이 깊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넓고 깊다는 걸 의미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에 기초해서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간다는 걸 의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읽고 이해하는 해석의 피상성을 넘어섰다는 걸 의미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을 생각 없이 따라가는 신앙생활의 상투성에서 빠져나와 근원 진실을 붙잡고 씨름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신앙이 깊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실재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는 걸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신앙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이 깊었습니다. 참으로 깊고도 깊었고, 깊고도 넓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그저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 신앙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았지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고 보지는 못했습니다. 바둑 9급이 바둑 9단의 수를 읽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이 좋기만 한 유대인들은 신앙이 깊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신앙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와 똑같습니다. 이천 년 전에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신앙이 깊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오늘의 교회도 신앙이 좋은 목사와 장로와 집사들이 신앙이 깊은 자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있습니다. 소위 신앙이 좋은 자들이 교회를 점령하고 있고, 이들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고, 이들의 잣대가 교회의 기준이 되어 모든 걸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이 깊은 자들이 발붙일 곳이 거의 없습니다. 말 붙일 곳도 없고, 발붙일 곳도 거의 없어요. 한국교회는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을 양성하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한국교회는 신앙이 깊은 사람을 양성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아니, 실패했다기보다는 아예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솔직히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도들의 신앙을 좋게 하는 데만 열을 올렸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을 문자 안에 가두는 데만 열성을 쏟았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을 문자 안에 가두어야 신앙이 좋아지고, 신앙이 좋아져야 교회가 성장하니까 성도들의 신앙을 좋게 하는 데만 열을 올렸던 것이고, 또 목사 자신이 신앙이 좋기만 했지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까 신앙이 깊은 데로 인도할레야 인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고, 그러다 보니 지금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은 거의 없고 소위 신앙이 좋기만 한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 신앙이 좋기만 해서 해롭고 위험한 신앙으로 추락한 자들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심히 해로운 교회, 심히 위험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좋은 신앙에서 깊은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좋은 신앙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깊은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고 말씀하신 대로 깊은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이 깊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선 신앙의 지평이 우주 전체로 확장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오묘함을 알기에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고, 자기 확신에 빠지지 않게 되고, 쉽게 경계를 긋지 않게 되고, 문자에 갇히지 않게 되고, 모든 인식과 언행이 상투적이지 않게 되고, 오래된 습속이나 종교성에서 자유롭게 되고, 군중과 함께 예배하는 게 아니라 지극히 적은 자들과 예배하게 되고, 단지 예배의식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과 몇몇 신앙 공식의 틀을 넘어서게 되고, 율법 없이 율법을 행하게 됩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의 진정한 복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깊은 자리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이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복,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복, 세상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복,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이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