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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열린 세계로 들어가는 문

2019.07.14 14:58

정병선 조회 수:143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마태복음5: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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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은 두 말할 것 없이 책 중에 책입니다.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또 삶에 대하여 부분을 말하지 않고 전체를 말한다는 면에서, 궁극적 진실을 말한다는 면에서, 특히 이 모든 것을 정직하고 깊이 있게 말한다는 면에서, 성경은 단연 최상의 책입니다. 물론 성경은 철학책도 아니고, 역사책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철학보다 더 깊은 철학, 역사보다 더 깊은 역사, 과학보다 더 깊은 과학이 담겨 있습니다. 누구나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철학 이상의 책, 역사 이상의 책, 과학 이상의 책, 문학 이상의 책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또 삶에 대하여 최고의 진실을 담고 있는 영혼의 책이자 진리의 책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한 책입니다. 깊이와 넓이가 무궁무진한 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책보다 오독이 심합니다.

 

2.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당연히 문자에 충실하게 읽어야 합니다. 문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되고, 글의 문법적 구조를 따라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자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에 충실하게 읽되 문자 너머를 읽어야 하고, 이야기를 따라 읽되 이야기 너머를 읽어야 합니다.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의미와 메시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깊이와 넓이가 무궁무진한 성경의 세계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존재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바꿔 말하겠습니다. 문자만 읽어가지고는 성경 속으로 못 들어갑니다. 아무리 백 번을 읽고 천 번을 읽어도 문자만 읽고 믿어서는 성경 속으로 못 들어가요. 바울이 오래 전에 말했습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후3:6) 예, 놀랍게도 문자는 사람을 가두고 죽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맹세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5:21-44). 똑같은 형식으로 다섯 번이나 이야기했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다섯 번씩이나 똑같은 형식으로 말한 것일까요? 문자만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문자 너머까지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라는 말을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4:32-34).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경험한 출애굽 사건을 좁은 눈으로 보지 말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창조 때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통해 보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과 비교해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거시적인 눈으로 봐야 비로소 출애굽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야곱 이야기,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고 홍해를 건넌 이야기,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이야기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그 속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문자만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이것을 알고 에베소 교회에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엡2:11) 한 마디로 구원받았다고 좋아하지만 말고 예수를 알기 이전에 너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 예수 안에서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가 하신 일이 어떤 일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엡2:11-17). 히브리서 저자도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고 주문했습니다.

 

옳습니다. 믿기만 하면 안 됩니다. 특히 문자대로 믿기만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어떤 일인지도 살펴봐야 하고, 세상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들여다봐야 하고, 문자를 통해 문자 너머까지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하면 그 전능함이 어떤 의미의 전능함인지, 예수가 신이면서 인간이라고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고 하면 그 구원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등등을 묻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깊고 넓은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임재 안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믿기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문자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믿는 일에만 주력합니다. 교회도 믿음 없는 것이 문제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지켜주시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합니다. 죽어라고 믿었는데 사업이 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신실하게 믿음생활 했는데 교통사고로 죽거나 암으로 죽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믿으라고만 말합니다. 성도들도 여호와께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신다고 했으니(신28:13)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그냥 믿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나를 믿는 자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막16:17-18)는 말씀도 문자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고, 의심 없이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믿습니다. 500년 전에 마르틴 루터가 ‘오직 믿음’을 외친 이래로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기만 힘썼습니다.

 

4.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믿음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라고 믿기만 했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고, 예수가 생명이라고 믿기만 했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 말씀을 믿었으면 성경이라는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하나하나 살피고 묻고 배우고 공부하는 신나는 탐험을 해야 하는데 그냥 문자대로 믿기만 했기 때문에 성경을 잘못 읽게 된 것이고, 성경을 잘못 읽었기 때문에 길이신 예수 안에서 길을 잃고, 생명이신 예수 안에서 생명을 잃게 된 것입니다.

5.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합니다. 맞습니다. 한 편의 그림도 아는 만큼 보이고, 한 편의 음악도 아는 만큼 들립니다. 여행을 가도 아는 만큼 보이고, 박물관을 가도 아는 만큼 보이고, 책을 읽어도 아는 만큼 보입니다. 성경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신과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또 삶에 대하여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백 사람이 읽으면 백 사람의 이해가 다 다릅니다. 초등학생이 이해하는 것과 대학생이 이해하는 게 다르고, 초신자와 연륜 있는 자의 이해가 다르고, 고난을 겪은 자와 겪지 않은 자의 이해가 다르고, 신학을 깊이 공부한 자와 겉핥기만 한 자의 이해가 다릅니다.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이해하는 정도만 다른 게 아니라 오독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고 못하실 일이 없다, 70억이나 되는 사람들의 마음 속 생각까지도 훤히 꿰뚫어 아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룻밤에 억만장자가 되게도 하시고, 말기 폐암도 고쳐주시고, 마음의 깊은 상처도 깨끗이 치유해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했다, 그러면 문자 그대로 6일 동안에 세상을 뚝딱 만들어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오독인데 이렇게 잘못 읽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교회 역사는 한 마디로 성경 오독의 역사이고, 성경 오독의 폐해로 벌겋게 물든 역사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겠습니다. 천동설을 믿던 중세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어떻게 했습니까.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조르다노 부르노 등 일련의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절대 진실이라고 믿어 왔던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하자 교회는 앞뒤 안 가리고 불경죄로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갈릴레오는 자기주장을 철회해 목숨을 건졌습니다만, 조르다노 부르노는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아 화형 당했습니다(1600년. 52세). 실로 무지막지한 악을 행했습니다.

 

6. 조르다노가 화형당하고 260년이 지난 1859년에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발표한 겁니다. 그러자 교회는 또다시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했습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한다면서 극렬히 반대했습니다. 다윈이 죽은 지 2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40년 전인 1978년에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시카고 선언’에 모여 ‘성경은 한 자 한 획까지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오류나 결함이 없다’고 성경 무오설을 선언했는데요,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도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세계와 생명체의 근원에 관해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의 원형은 모세 오경의 첫째 부분인 창세기가 묘사하는 바대로, 창조가 이루어진 6일 동안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졌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도 복음주의 교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창조과학회’를 중심으로 진화론과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진화론과의 싸움은 영적 전쟁이라고 하면서 진화론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게 교회가 패배한 것처럼 이번에도 다윈에게 교회가 패배할 것이 거의 명백합니다. 솔직히 이 시대에 진화를 부정하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만 진화를 부정하지 세상 전체가 진화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빅뱅 이론에서부터 카오스 이론, 불확정성 이론, 양자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이 진화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론은 이미 과학적 사실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지동설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인정받은 것처럼 진화론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아주 보수적인 몇몇 신학자들만 진화론을 부정하지 자연과학을 공부한 신학자들은 대부분 진화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회 신부이자 지리학자요 고생물학자인 테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은 100년 전에 자연과학을 연구하면서 다윗의 진화론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고, 그래서 진화론에 기초한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1928-2014)도 하나님이 땅에게 말을 걸어 온갖 식물과 동물을 내라고 명하신 사실을 지적하면서(창1:11,24) 땅에서 모든 동물이 탄생했다면, 그것은 무기물에서 생명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이 점을 간파하지 못한 채 ‘생명은 하나님이 직접 그분의 손으로 만들었으므로 무기물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고만 고집했다’고 지적했습니다(신, 인간, 그리고 과학. 119쪽).

 

7. 여러분,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아닙니까? 사실 앞에 정직하고, 진실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 아닙니까? 사실 그리스도인은 단지 믿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문자에 갇힌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문자보다 크고, 성경보다 크고, 우주보다 크기 때문에 하나님과 진리에 눈 뜬 자는 끝없이 진실을 탐구하고, 새로운 진실이 발견되면 그 진실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자기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새롭게 발견된 진실 앞에 무릎 꿇고, 새롭게 발견된 진실을 통해 기존의 이해를 수정해나가고 확장해나갑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교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500여 년 전에 교회가 지동설을 부정하고 천동설을 고집했듯이 지금도 교회 또한 우주의 나이가 140억년이라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6천 년 전에 우주가 창조됐다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진화와 창조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고 외장치면서 진화론과 창조론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8. 그러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은 심히 좁은 생각이고, 매우 오만한 독단입니다. 이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인간일 수는 없다, 남자가 인간이든지 여자가 인간이든지 둘 중 하나만 진실일 수 있으니 남자와 여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독단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독단을 수없이 자행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교회는 독단과 독선이 가득한 집단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정도로 많은 독단과 독선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의 길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사랑의 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해서 앞서 거론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조르다노 부르노, 테야르 드 샤르댕,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이 말씀의 길을 간 사람이고, 믿음의 길을 간 사람이고, 사랑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이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통점 하나가 발견됩니다. 이들은 단순히 믿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예, 이들은 단지 믿기만 하지 않았어요. 이들은 자기가 믿은 하나님의 세계, 성경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성경의 세계는 실로 무한하기 때문에, 우연과 필연이 동시에 작동하는 심히 역동적인 세계요 열린 세계이기 때문에 이들은 편견과 독단에 사로잡힐 수 없었고, 문자에 갇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향해 나아갔고, 믿음으로 성경이라는 낯선 세계로 들어갔고, 믿음으로 근원 진실을 탐구했고, 믿음으로 자기들이 살피며 공부한 세계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지평을 열어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길이고, 믿음의 길이고, 사랑의 길이고, 진리의 길입니다. 결국 성경이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믿음은 닫힌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다. 믿음은 열린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