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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의 사랑 나의 아픔

2019.07.07 16:07

정병선 조회 수:55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마태복음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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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스무 살에 하나님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교회의 품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교회를 통해 복음의 세계로 들어왔고, 교회를 통해 복음을 배웠고, 교회 안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제 삶의 중심은 한 마디로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제 삶의 자리였고, 교회가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세상에는 교회 외에도 여러 단체나 기관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선단체나 공익단체도 있고, 학교나 기업을 비롯해서 수많은 학술단체나 예술단체가 있습니다. 각종 민간단체나 동호회들도 여기저기에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직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에 속해 살았습니다.

제가 목회자라서가 아닙니다. 40대 후반에 건강이 무너져 목회를 중단했을 때에도 저는 목회할 때와 똑같이 교회에 속해 살았습니다. 주일마다 교회당에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주중에는 구역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이처럼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에 속해 살아온 것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저는 그 몸의 지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옳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해 살아온 것이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교회에 속해 살아갈 것입니다.

 

2. 그런데 이렇게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에 속해 살아오면서 저는 너무도 가슴 아픈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런 건 아니고 꽤 오래 전부터 그런 낌새가 시작됐는데요, 교회가 점점 낯설어지는 너무도 황망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나 언행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뭔가가 어색한 느낌이 들고,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들고, 날이면 날마다 다람쥐가 같은 쳇바퀴를 돌듯이 같은 괘도만을 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회의 일거수일투족이 점점 낯설어지는 느낌, 교회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느낌, 내가 교회에 속해 있지만 점점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커지고 있습니다. 동료 선후배 목사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관심사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분명히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님을 믿고, 같은 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우리가 정말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 맞나?’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소통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3.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제 신앙이 삐딱해져서 그런 것일까요? 예전의 저를 알고 있는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신앙이 삐딱해져서 그런 게 아니라 제 신앙의 지평이 예전보다 넓어지고 깊어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더 열려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4. 저는 본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교과서가 제가 읽은 책의 전부일 만큼 책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달라졌습니다. 저는 예수님 손에 이끌려 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제일 먼저 성경 속으로 들어갔고, 성경을 읽으면서 점차 알고 싶은 게 많아졌고, 의문이 많아졌고, 그래서 한 권, 한 권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10년, 20년, 30년, 40년을 그렇게 한 권, 한 권, 보석 같은 책들을 찾아 읽었습니다.

저에게 책읽기는 단순한 책읽기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책읽기는 저자와 일대 일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물으며 깊은 사색을 하는 통찰의 시간이었고, 저의 부족한 이해를 교정하고 확장하는 변혁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지, 내가 알고 있는 것에 얼마나 틀린 부분이 많은지를 발견하고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저의 책읽기는 이해의 지평이 수정되고 확장되고 깊어지는 지평융합의 시간이었고, 근원 진실에 눈떠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근원 진실에 눈떠갈수록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구원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에 눈떠갈수록 나를 키운 교회, 내가 속한 교회가 근원 진실에서 멀리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여야 할 교회가 신앙의 진실을 철저하게 배반하고 있고, 입만 벌리면 다들 예수, 예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길을 가고 있고, 예수님 말씀으로 예수님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충분히 알지 못할 때는 저도 교회가 하는 말이 다 옳은 줄 알았습니다. 교회가 하는 말이 다 하나님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하나 진실에 눈떠가면서 교회가 하는 말에 엉터리가 많다는 것, 오류와 왜곡이 심각하다는 것, 문자적으로는 성경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성경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도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아직도 어둡습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실상이 훤히 보이기는 합니다. 몇 마디만 들어봐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디에서 걸려 넘어지고 있는지가 짐작되기는 합니다. 한 마디로 지금 한국교회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생각됩니다.

 

5.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볼 때마다 너무너무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솔직히 제 안에는 한국교회에 대한 양가감정이 있습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역겨움이 있고,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동시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분노와 절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던(막6:34) 그 마음이 제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시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마3:7) 분노하실 때의 그 마음도 제 안에 있습니다.

 

6.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교회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고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신앙고백을 듣고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한 ‘반석’은 ‘베드로’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가톨릭에서 그런 해석을 많이 합니다(베드로가 ‘반석’이란 뜻이기에 더욱 그렇게 해석함). 그러나 그것은 너무 좁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반석’은 한 사람 ‘베드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 즉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고백을 가리키고, 궁극적으로는 신앙고백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게 더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한 말씀은 사실상 이런 말입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구나. 네가 말한 대로 나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한 것인 만큼 그 앎은 영원히 요동하지 않는 반석과 같다. 세상의 모든 앎은 세월과 함께 흔들리고 뒤집어지지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이 앎은 반석과 같이 요동하지 않는다. 나는 반석 같은 이 앎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좀 더 궁극적으로는 네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나'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7. 옳습니다. 세상의 모든 앎은 다 부분적인 앎입니다. 언제 흔들리고 무너질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앎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과학을 확실한 앎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은 결코 확실한 앎이 아닙니다. 이탈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과학을 한다는 것은 하루하루 자신의 한계와 씨름하며 알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과 대결하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는 우리가 연구하는 이 아름다운 이론이 정말로 옳은지를 알지 못한다. 빅뱅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폭풍, 박테리아, 눈, 우리 몸의 세포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255쪽). 사실입니다. 인간의 앎 중에 가장 확실한 앎인 과학조차도 사실은 불확실한 앎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앎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앎은 통전적인 앎입니다. 전체를 포괄하는 앎이고, 깊이를 꿰뚫어보는 앎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는 그리스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앎은 영원히 요동하지 않는 진실에 뿌리박은 앎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앎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옳습니다. 교회는 영원히 요동하지 않는 앎, 전체를 포괄하고 깊이를 꿰뚫는 통전적인 앎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예수님께 천국 열쇠를 건네받은 매우 특별한 기관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도 합니다(딤전3:15).

 

8. 그런 면에서 저는 교회보다 더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복되고 의미 있는 기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길거리의 커피숍만큼이나 흔하고 흔한 것이 교회이고, 사람들이 외면하고 질타하는 천덕꾸러기가 돼버렸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을 위해 가장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학교 하나를 세우는 것보다 낫고,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기업 하나를 세우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값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번 교회 세우는 일에 도전했습니다. 교회가 서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 없고, 교회가 교회 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고 믿고 교회 세우는 일에 도전했고, 교회 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큰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또 제가 기도하고 생각한 만큼 의미 있는 결과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씀을 좇아왔습니다.

언젠가 모 집사님이 그러더군요. 우리 목사님은 순수 그 자체라고. 이번에 일산은혜교회에 구원론 강의하러 갔을 때 강경민 목사님도 그럽디다. 정병선 목사의 최대 단점은 너무 순수한 것이라고. 그리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맞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순수한 사람이 못되니까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죄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런 제가 어찌 순수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결코 순순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순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것은 있었지만 다른 불순물을 섞어서 복음을 왜곡하거나 흐리게 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 복음을 이용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두 번째 목회를 시작한지도 8년이 지났는데 지금껏 반반한 성과물 하나 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고 복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묻고 또 물으며 공부했고, 그렇게 물으며 깨달은 복음을 정직하게 나누었습니다. 지금 와서 8년을 돌아보니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수시로 외롭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한계에 부닥쳐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행복이 더 컸습니다.

 

9. 저는 그렇게 8년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교회당 없는 교회’의 길을 가기로. 물론 우리가 원해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처한 현실에 떠밀려 원치 않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원치 않는 선택을 하고 보니 이 선택이 참 좋은 선택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 알다시피 한국교회는 130년밖에 안 된 교회입니다. 2000년에 교회 역사에 비하면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너무 빨리 성장했고, 너무 빨리 늙어버렸습니다. 너무 빨리 제도화됐고, 너무 빨리 중세 가톨릭교회보다 더 부패한 교회가 됐고, 너무 빨리 성전체제가 됐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성전체제를 무너뜨렸는데 한국교회는 너무도 빨리 성전체제로 돌아갔습니다.

 

10. 성전체제는 영적 관리체제요 종교적 관리체제요 율법적 관리체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관리체제가 아닙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생명의 공동체이지 관리체제가 아니에요. 성전체제와 하나님나라, 성전체제와 교회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와 교회가 서려면 반드시 성전체제가 무너져야 합니다. 성전체제가 무너져야만 교회가 교회로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성전체제를 무너뜨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막13:2). 오늘도 똑같습니다. 오늘도 하나님나라가 서고, 교회가 서려면 성전체제가 무너져야 합니다. 성전체제가 무너져야만 교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성전체제가 무너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교회당 없는 교회의 길’을 가는 것이 현재의 성전체제를 무너뜨리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당 없는 교회의 길’을 가는 것이 현재의 성전체제를 무너뜨리는 현실적인 길이고, 무너져가는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길이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가지 않은 이 길을 새로이 가보려 합니다. 성령님께 묻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말씀 앞에 앉아 묵상하고 탐구하면서 지금껏 가보지 않은 새로운 옛길을 가보려 합니다. 뒤늦은 깨달음이라서 못내 아쉽긴 합니다만 뒷북을 치면서라도 가보려 합니다. 또다시 소년의 마음으로 나의 사랑이요 나의 아픔인 교회를 품고 교회를 꿈꾸며 가보려 합니다. 이 길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여는 길이라 믿고 주님 바라보며 가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