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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11-'육의 몸'과 '신령한 몸'

2019.05.12 17:19

정병선 조회 수:52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5: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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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저자들 가운데 부활 문제에 깊이 천착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 가장 많이 말한 곳이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리스의 중심 도시 중의 하나인 고린도에는 우상숭배자들도 많았지만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만, 1세기 사람들 가운데에도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의 의문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가 첫 번째 의문이었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치자, 그러면 어떤 종류의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는 것이 두 번째 의문이었습니다(15:35). 솔직히 두 의문은 매우 정당한 의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한 번 죽은 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까, 그것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현실이고 자연의 법칙이니까,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이냐, 라고 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또 백 번을 양보해서 부활이 있다고 쳐도 부활의 실체가 무엇이냐, 어떠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냐, 하는 것도 마땅히 제기해야 하는 의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이해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고 묻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런 의문 없이 그냥 믿는 것보다는 이런 의문과 씨름하면서 믿는 것이 훨씬 온전한 믿음, 전인적인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의문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의문은 필요 없다고,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제기하는 의문을 존중하고 성심성의껏 응대했습니다. 바울이 여러 편지를 쓴 것도 이런 응대의 일환이었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말한 것도 이런 응대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응대치고는 바울의 첫 마디가 좀 거칠고 차갑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조롱하듯 일갈합니다. 왜 이렇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일갈했을까요? 저들의 의문과 주장이 하도 억지스러워서였을까요?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일이여서였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부활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바울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솔직히 바울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거든요. 그런데도 바울이 ‘어리석은 자여’라고 일갈한 것은 저들이 자기 경험에 갇혀 있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있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사람은 거의가 자폐적입니다. 다들 자기 안에 갇혀 있어요. 자기가 경험한 것, 자기 눈에 보이는 것, 자기에게 이해되는 것만을 받아들이려 하지 그 외의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일단 거부하고 부정하려듭니다. 사람이 그래요. 사람은 거의 자폐적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 있고, 자기 이해에 갇혀 있고, 자기가 보는 것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의 핵심입니다. 어리석음이란 다른 게 아니에요. 자기 경험에 갇혀 있고, 자기 이해에 갇혀 있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있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한 사람의 경험이나 앎이라는 건 아무리 많아도 한 줌밖에 안 되는데 그걸 절대화하고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석학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대단한 도를 깨우쳤다 하더라도,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자기 이해에 갇혀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 사람이 석가모니든, 공자든, 소크라테스든, 아인슈타인이든 자기 안에 갇혀 있고, 자기 이해에 갇혀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예수 믿기 힘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 때문일 겁니다. 자기 이해에 갇혀 있고, 자기 경험에 갇혀 있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듣기가 힘든 것이고,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용서와 부활을 믿기가 힘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이것을 간파했을 겁니다. 그래서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일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저들의 의문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하여.

바울은 식물의 씨 뿌리는 것을 통해 설명합니다(15:36). 지금은 사람들이 대부분 도시의 콘크리트 속에서 살기 때문에 씨를 뿌리는 일이 생경하지만 예전에는 씨 뿌리는 일이 일상사였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일상의 예를 가지고 부활을 설명합니다. 철이 되면 씨를 뿌립니다. 밀도 뿌리고, 보리도 뿌리고, 볍씨도 뿌리고, 사과씨도 심고, 수박씨도 심습니다. 이렇게 씨를 뿌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씨가 죽습니다. 땅 속에서 썩어 해체됩니다. 그런데 썩고 해체된 씨에서 싹이 나옵니다. 반대로 씨가 땅 속에서 썩고 해체되지 않으면 절대 싹이 나오지 않습니다. 씨가 썩고 해체돼야만 싹이 나옵니다.

사람의 생명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씨가 죽음으로써 씨가 발아하듯이 사람의 생명도 육의 몸이 죽고 썩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이자 유추입니다. 철학적인 논증이 아니라 땅에 뿌린 씨가 발아하는 것을 통해 사람의 죽음과 부활을 유추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단순한 유추가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고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허구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날조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몇몇 여자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일이고,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신 적도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들 중에 태반이 살아있는 당대의 사건입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도한 증인입니다(15:3-8).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은 사실이니까, 이론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날도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고 수많은 증인들이 있는 역사적 사실이니까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믿습니다. 베드로가 봤고, 도마가 봤고, 요한이 봤고, 막달라 마리아가 봤고, 바울이 봤다고 말하는데도 사람들이 안 믿습니다. 다른 사례를 발견할 수 없으니까, 누구도 부활한 사례가 없는데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치고 안 믿습니다. 부활의 전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놨다면 믿을 수도 있겠으나 어떤 증거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부활했다는 분도 하늘로 승천해버리고 없으니까 아무리 사실이라고 강변해도 안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씨의 비유를 통해 유추합니다.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비유를 통해 유추를 끌어냅니다. ‘씨가 발아하는 것을 보십시오. 땅에 뿌린 씨가 일단은 죽지 않습니까.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씨가 죽음으로써 오히려 씨가 발아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육체가 썩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육체가 썩음으로써 오히려 육체가 새로운 몸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라고 유추를 끌어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에 대한 바울의 설명입니다.

 

둘째로 부활의 몸이 어떤 몸이냐는 의문에 대하여.

여기서도 바울은 씨를 통해 유추를 끌어냅니다. 씨를 뿌립니다. 사과 씨를 뿌렸는데 사과 씨가 나온 게 아니라 사과나무가 나옵니다. 수박씨를 심었는데 수박씨가 나온 게 아니라 수박 잎이 나옵니다. 물론 씨 안에 식물의 형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박씨 안에 수박의 유전자 정보를 다 집어넣어 놓으셨기 때문에 수박씨에서 수박 잎과 덩굴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이 주목한 것은 씨와 씨에서 나온 형체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주목하고는 거기서 부활의 몸이 어떤 몸일지를 유추해냈습니다(15:37-38). 부활의 몸은 현재의 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씨와 씨에서 나온 형체가 다르듯이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의 육체도 예로 듭니다. 이 땅에는 여러 형태의 육체가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가 있고, 짐승의 육체가 있고, 새의 육체가 있고, 물고기의 육체가 있습니다. 살덩어리로 치면 다 똑같은 살덩어리인데, 사람의 육체와 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와 물고기의 육체가 다릅니다. 하늘에 있는 여러 발광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광도 제각각 다릅니다(15:39-41).

바울은 이런 사실을 통해서 부활의 몸과 현재의 몸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현재의 몸은 썩습니다. 욕됩니다. 약합니다. 땅에 속한 형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썩지 않습니다. 영광스럽습니다. 강합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를 갖고 있습니다.’(15:42-44)

 

여기서 많은 오해가 일어나는 것이 ‘육의 몸’과 ‘신령한 몸’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의 몸’을 ‘육체가 있는 몸’이라고 생각하고, ‘신령한 몸’을 ‘육체가 없는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전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려고 한 것은 현재의 몸은 부패하기 쉽고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고, 부활의 몸은 부패하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겠습니다. 바울이 ‘육의 몸’이라고 한 것은 ‘육체가 있는 몸’이라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인간의 프시케(영혼)가 동력이 되어 살아가는 몸’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고, ‘신령한 몸’이라고 한 것은 ‘육체가 없는 몸’이라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프뉴마(새로운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숨결,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힘)가 동력이 되어 살아가는 몸’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현재의 몸은 ‘자기 영혼의 힘으로 살아가는 몸’이고, 부활의 몸은 ‘하나님의 영의 힘으로 살아가는 몸’이라는 것, 이것이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의 근본적인 차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육체가 있는 몸’이냐 ‘육체가 없는 몸’이냐에 매달립니다. 육체가 없는 몸이라야 부활의 몸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의 몸’은 ‘육체가 있는 몸’이고, ‘영의 몸’은 ‘육체가 없는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네페쉬,프쉬케)을 비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육체와 구별하여 말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벧전2:11) 대부분은 목숨, 생명력, 존재의 중심, 존재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씁니다(시23:3,33:20,35:9,42:5,142:4,겔18:4,행7:59,고후1:23,벧전1:9,요삼1:2). ‘영혼’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오는 게 시편인데요, 시편에서는 거의 다 목숨이나 존재 전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우리들도 일상에서 그런 뜻으로 말할 때가 많습니다(영혼 없는 대답, 영혼 없이 일한다, 영혼이 있는 승부 등). ‘영’(루아흐,프뉴마)이라는 단어도 하나님의 영이나 인간의 영혼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목숨, 존재의 중심, 존재 전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롬2:9,8:10,8:16,고전6:17).

 

이처럼 성경은 ‘영’이나 ‘영혼’이라는 말을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합니다. 숨, 바람, 호흡, 생기, 생령, 생명, 의지, 목숨, 마음, 정신, 인간의 중심, 소원, 욕망, 힘, 하나님의 영, 성령, 인간의 영 등등 아주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영혼’을 인간 안에 있는 비물질적인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톰 라이트는 우리가 이렇게 오독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플라톤의 공장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정신적 물품들을 사온 나머지, ‘영혼’은 무언가 비물질적인 것을 의미하고 ‘물체’는 무언가 물질적이고 견고하고 ‘육체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서로가 존재론적으로 대조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우리는 견고한 사물은 한 종류의 것이고, 관념, 가치, 영혼, 귀신과 같은 것들은 또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육체는 부패하고 죽으며, 집, 성전, 도시, 그리고 문명은 재가 되어 사라지듯이 우리는 몸을 가진 다는 것, 육체를 가진다는 것을 영속적이지 않고, 변덕스럽고, 일시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하면서, 영속적이고, 변하지 않고, 불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비물질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 244쪽)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 생각이 거의 내면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이 습성에서 해방돼야 합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고에서 해방돼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육체와 영혼을 플라톤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과학자이자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육체’와 ‘영(혼)’은 인체의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고 인간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명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신약학자 제임스 던도 바울이 사용하는 ‘영혼’, ‘육체’, ‘몸’ 같은 용어들을 인간의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가 아니라 삶의 양태적 특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191쪽 참조).

 

옳습니다. 바울이 말한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은 ‘육체가 있는 몸’과 ‘육체가 없는 몸’을 뜻하지 아닙니다. ‘육의 몸’은 자기 영혼의 힘으로 살아가는 몸을 뜻하고, ‘신령한 몸’(영의 몸, 영광스러운 몸)은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몸을 뜻합니다. ‘육으로 사는 것’은 통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걸 뜻하고, ‘영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는 삶을 살아가는 걸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