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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빌립보서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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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보기 드문 사건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 되는 기이하고 역설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한 마디로 사랑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사건입니다. 사랑의 정수가 무엇이고, 사랑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전무후무한 사랑의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고난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랑을 봅니다. 수많은 허물과 죄악을 다 용서하는 사랑, 비루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운명을 송두리째 끌어안는 사랑,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해 죽음의 자리까지 들어가는 진짜 사랑을 봅니다. 예,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던 십자가는 진짜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에서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이 더 많다”고 일갈했습니다. 맞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우상이 득실거립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돈이라는 우상, 성공이라는 우상, 인류 대학이라는 우상, 데이터라는 우상, 과학기술이라는 우상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니체처럼 저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진실보다 거짓이 더 많습니다.” 요즘 가짜 뉴스가 화제인데 사실은 가짜 뉴스가 새로이 등장한 건 아닙니다. 과거에도 가짜 뉴스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가짜 뉴스가 있었고, 삼국시대에도 있었고,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도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짜 뉴스의 희생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죽음이었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죽음이었습니다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만들어낸 가짜 뉴스(하나님을 모독했다는)에 휘말려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가짜 뉴스(눅22:70-71), 로마에 세금을 내지 못하게 한 반역자라는 가짜 뉴스(눅23:2)를 퍼뜨려 죽인 것입니다. 빌라도나 로마 병사가 죽인 게 아니에요.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서기관들, 이놈들이 가짜 뉴스를 퍼뜨려 죽인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항상 인간 세상은 그랬습니다. 진짜를 따르는 자보다 우상을 따르는 자들이 훨씬 많았고, 진실을 따르는 자보다 거짓을 따르는 자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거짓 중에서도 최대의 거짓, 최고의 거짓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나라마다 내려오는 건국신화일까요?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일까요? 석가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말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는 것일까요? 예수는 로마의 반역자라는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의 이원론(플라톤이 체계화함)과 기독교의 영혼구원론이 가장 많은 사람을 속인 인류 최대의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악한 거짓이라고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을 속이고 등쳐먹기 위해 꾸며낸 새빨간 거짓이라고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스의 이원론이나 기독교의 영혼구원론은 사악한 거짓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한 마디로 진리의 모양을 갖춘 거짓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 진지하고 정직하게 우주만물의 이치를 묻고,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살피는 가운데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이원론이고, 이원론을 통해 성경이 말한 구원을 이해한 것이 영혼구원론이기 때문에 새빨간 거짓이라고 몰아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라는 잣대에 비추어보면 그리스의 이원론과 기독교의 영혼구원론은 거짓입니다. 다른 어떤 거짓보다도 가장 많은 사람이 믿고 따른 인류 최대의 거짓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악한 거짓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진리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고, 세상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같아 보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른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 기독교입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을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플라톤은 “예수가 탄생하기 400년 전에 존재한 그리스도인”이요 “헬라어로 저술한 모세”라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을 집대성한 아우구스티누스도 [고백록]에서 플라톤 철학이 표현은 성경과 다르지만 내용적으로는 기독교 진리와 완전히 같은 부분이 많다고 경탄했습니다. 철학과 신학을 함께 공부한 김용규 선생님은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 절묘한 말을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정리한 기독교 교리와 사상 중 그 어떤 것도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나온 것은 없지만, 그중 어느 것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서 정리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21쪽).

 

맞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초기부터 그리스 철학(이원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관적 사실입니다. 교회가 태동하고 성장할 당시에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플라톤 철학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자들도 플라톤의 눈으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도 플라톤의 이원론에 기초해서 읽었습니다. 그 결과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영혼구원이라는 괴이하고 쥐방울만한 구원으로 뒤틀리고 쪼그라들어버렸습니다.

성경은 우주만물의 구원을 말하고, 세계의 구원을 말하고, 삶의 구원을 말하는데, 교회는 플라톤의 눈으로 성경을 읽은 나머지 우주만물의 구원, 세계의 구원, 삶의 구원은 다 놓치고 영혼구원만 말했습니다. 자그마치 이천년 동안 변함없이 영혼구원만 믿고 영혼구원만 말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고,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했던 것처럼(사55:2) 신약시대의 수많은 목사와 그리스도인들도 구원 아닌 것(영혼구원)을 위해 은을 달아주며 수고해왔습니다. 우주만물의 구원, 세계의 구원, 삶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혼 구원에만 매달리며 삶을 탕진해왔습니다.

 

물론 사람들을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플라톤이 이원론을 체계화한 것이 사람들을 속이려고 그런 게 아니듯이 교회가 영혼구원을 말한 것도 사람들을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영혼구원을 진짜 구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영혼구원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무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거짓을 말한 것이고, 구원 아닌 것을 위해 소중한 삶을 탕진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영혼구원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혼구원보다 훨씬 큰 구원을 소망하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구원)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재림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1:6) 이 말에 의하면 바울은 구원을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 정도로 본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가야 비로소 완성될 일이라고 본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뒤에 가면 지금 한 이 말과는 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말들이 나옵니다. 바울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빌1:20-21). 한 걸음 더 나아가 차라리 세상을 떠나(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고백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털어놓습니다(빌1:23). 고린도후서 5장에서도 같은 심정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v.8)

 

바울은 지금 자기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단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고 싶다고만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읽는 즉시 마음에 담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문자 그대로 마음에 담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세상에서 힘겹게 사는 것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야, 그리고 죽으면 바로 주님과 함께 있게 돼, 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최상의 소망이고 최후의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최종적 현실이고 최상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까지 생각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 부활은 부활절에만 생각하지 평상시에는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그저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최선의 복이요 최상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최종적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앞에 인용한 말씀이 바울이 말한 전부라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씀만 하고 다른 말씀을 안 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말을 한 다음에 곧이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빌3:11)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자기가 달려가는 마지막 종착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달려가는 마지막 종착지는 죽은 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거예요. 죽은 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게 아니라 부활이라는 진짜 상황, 진짜 현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약간 달리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이 말은 앞에서 한 말과 사실상 같은 말입니다. ‘부활’을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바꿔 말했을 뿐이지 내용은 같은 말입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달려가는 마지막 종착지는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기 원하는 최후의 상, 궁극의 유업은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부활이 자기가 달려야 할 마지막 종착지요 자기가 받아야할 궁극의 상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걸 빼먹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진짜 유업은 빠뜨리고 죽은 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 안에 있는 편집증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일종의 편집증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편집증이 작동합니다. 자기에게 어필되는 말씀만 듣고 마음에 담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세상을 떠나(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한 부분은 마음에 담고 나머지는 통과시킵니다.

물론 성경을 읽다 보면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곧바로 부활을 영적인 부활로 이해합니다. 바울이 부활을 설명하면서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다”(고전15:44)고 했고, “피와 살은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한다”(고전15:50)고 했으니까 그 말씀에 근거해서 ‘육의 몸’과 ‘영의 몸’을 대비시키고, 육의 몸이 아닌 영의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피와 살을 가진 지금 우리의 몸은 절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피와 살이 있는 몸으로의 부활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더욱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했기 때문에 몸 없는 영혼이 하늘 어딘가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이 아닌 저 하늘 어딘가에 영적인 세계가 있고, 거기에서 영혼이 영원히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피와 살을 가진 지금 우리의 몸은 구원받지 못할까요? 바울이 정말 그런 뜻으로 말했을까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바울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한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말한 후에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고 말했습니다. 피와 살이 있는 현재의 몸은 낮은 몸(비천한 몸)이요 땅에 속한 것이니까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주님께서 우리의 낮은 몸(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면서 구원의 때를 기다리고 있고(롬8:19), 우리의 낮은 몸 또한 속량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롬8:23). 그렇습니다. 소, 닭, 돼지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개나리, 진달래도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데 우리의 몸이 왜 구원받지 못하겠습니까. 당연히 구원받습니다. 우리 몸과 영혼 전체가 구원받습니다. 전인이 구원받고, 전 삶이 구원받고, 우주만물이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궁극적 현실은 부활입니다. 부활하기 전까지는 구원이 완성된 게 아니에요. 부활해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3:11)고 말한 것입니다. 부활이 구원의 궁극적 현실이니까, 부활에 이르기 전까지는 구원이 온전히 성취된 게 아니니까 어떻게 하든지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구원의 궁극적 현실이고, 구원받은 자가 맞이할 궁극적 현실입니다. 죽은 후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궁극적 현실이 아니고, 부활이 궁극적 현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가 그동안 외친 영혼구원론은 거짓입니다. 인류 최고의 책인 성경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속인 인류 최대의 거짓입니다. 영혼구원은 예수님이 성취한 구원이 아닙니다. 영혼구원은 내가 죽어서 성취된 구원이지 예수님이 죽어서 성취된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 무덤에서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 전인을 구원하고, 우리 전 삶을 구원하고, 세계 전체를 구원하고, 우주만물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여, 다시 말씀드립니다. 영혼구원은 없습니다. 오직 전인 구원, 삶의 구원, 세계의 구원, 우주만물의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