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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누가복음20: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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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함께 나눈 말씀을 잠시 되짚어보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대로 일어난 사건(구약성경에 예고된 사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정작 부활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내세 신앙이나 영혼불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지만 부활에 대해서도 거의 말이 없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유일무이한 세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죽음을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이 부활을 말하지 않은 이 두 가지 이유가 곧 신약성경이 부활을 말하는 이유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이유입니다. 구약은 부활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을 말하는 토대이자 근거입니다. 그래서 구약이 없으면 예수님의 부활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부활시켰는지, 신약이 왜 그리도 부활을 중시하는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구약이 있어야만 하나님이 왜 예수를 부활시켰는지, 신약이 왜 그리도 부활에 목숨 거는지가 이해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요.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구약은 철저하게 현세 중심적이라서 죽음을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유일한 관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죽음을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이라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소멸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유물론자들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이라고 보는데 구약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이라고 보지 않아요.

구약은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봅니다. 구약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죽음을 말할 때 뭐라고 했는지를 보십시오.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창25:8, 35:29, 49:29,33)고 했습니다. 또 역대 왕들의 죽음을 말할 때에도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웠다,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다’(열상2:10, 11:43, 14:20)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죽음을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죽음을 존재의 소멸이라고 보았다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조상들과 함께 잔다’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죽은 조상들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으로 죽은 자의 존재가 소멸하는 게 아니라 앞서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서 그들과 재회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조상들과 함께 잔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면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때 장면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만 말씀하시고 끝내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고 덧붙이셨습니다(출3:6,15). 이 말씀은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고 영원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실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두개인들과 부활에 대해 논쟁하실 때 바로 이 말씀을 꺼냅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출애굽기 말씀을 꺼내시고는 곧바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주석을 다셨습니다(눅20:27-38). 참으로 정확무오한 주석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면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고 말씀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이삭에게 하신 언약,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두개인들과 부활에 대해 논쟁하실 때 이 말씀을 꺼내든 것입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죽었으나 죽은 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꺼내든 거예요.

예수님은 이 사실을 빼도 박도 못하게 확증하기 위해서 마지막 금쪽같은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20:38) 모든 사람이 살았다, 이 말씀은 실로 천지가 놀랄 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뿐 아니라, 모세, 다윗, 사무엘, 엘리야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죽은 자들이고, 우리에게는 소멸된 자들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살아있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비록 그 살아있음이 잠자는 것에 불과하긴 하나 어쨌든 살아있는 건 사실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매우 독특한 견해입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이원론자들이나 내세신앙을 믿는 자들은 대부분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생명, 진짜 생명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세상보다 훨씬 좋은 세상에서 완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도들도 현세는 끝없는 고통의 바다이고 다시는 환생하지 않아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고 극락에 들어가기를 열망합니다.

그런데 구약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극락세계로 들어간 자들은 다시 이 세상에 환생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절묘한 표현입니다.

 

잠시 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잠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잠은 완전히 죽은 상태도 아니고 역동적으로 살아서 활동하는 상태도 아닌 아주 어정쩡한 상태입니다. 또 잠자는 자는 반드시 깨어납니다. 이것이 잠의 특징입니다. 잠은 죽음에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죽은 상태는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떨어졌다가 깨어났을 때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말하거나 ‘죽음 같은 잠을 잤다’고 말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잠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 가운데 죽음에 가장 가까운 현상입니다.

구약은 바로 이 상태가 죽은 자의 상태에 가장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유물론자들이 생각하듯이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지도 않았고, 내세신앙을 믿는 자들이 생각하듯이 죽은 자는 이 세상에서보다 더 역동적이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보지도 않았습니다.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구약의 특징입니다. 구약은 죽은 자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았고, 죽은 자의 존재를 부풀리지도 않았습니다. 잠자는 것처럼 희미하게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가리켜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웠다,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즉 죽은 자가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로 존재한다면 영원히 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부딪힙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영원히 잠자는 상태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럴 리는 절대 없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잠자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는 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잠자듯 존재하는 것은 고통이 없다 뿐이지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서 지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텐데 그렇게 영원히 존재하는 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영원히 존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존재가 소멸하는 게 백 배 나을 것입니다. 잠자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저주 중의 저주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정녕코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잠자는 자는 반드시 깨어납니다. 이것이 잠의 두 번째 특징이에요. 옳습니다. 깨어나는 것이 잠의 법칙이고 잠의 목표이고 잠의 미래입니다. 우리가 잠을 자는 것은 새롭게 깨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히 잠자기 위해서 잠자는 사람은 없어요. 새롭게 깨어나기 위해서 잠을 잡니다. 그런 면에서 잠은 깨어남을 기대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깨어나는 게 아닙니다. 종말의 날이 오면 자동적으로 깨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깨우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깨우세요.

 

그렇다면 잠자는 자들은 언제 깨어날까요? 마지막 날 깨어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고전15:51) 예, ‘마지막 날’, ‘종말의 날’이 되면 죽은 자들이 다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지막 날 잠자는 자들이 깨어나는 게 아니라 잠자는 자들이 깨어나는 날이 마지막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은 분명히 옵니다. 죽은 자들이 깨어나는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날은 분명히 옵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은 깨어나서 어디서 살까요? 내세에서 살까요? 육체 없는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살까요? 만일 내세에서 살고, 육체 없는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산다면 굳이 육체로 부활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갈 유일무이한 세상이라면 상황은 180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이 유일무이한 세상이라면 죽은 자는 반드시 이 세상으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 외에는 다른 세상이 없으니까, 이 세상이 유일무이한 세상이요 참 세상이니까, 죽은 자는 반드시 이 세상으로 깨어나야 할 것이고, 반드시 육체를 가진 몸으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이 뭐라고 했습니까? 구약성경이 줄기차게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유일무이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존재가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로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샅샅이 살펴보세요. 성경은 죽은 자의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유령으로 여기저기를 떠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다른 존재로 환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내세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삶을 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가 잠자는 것처럼 희미하게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나팔을 불 때까지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로 희미하게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대전제이고 세계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아들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이 세상으로 부활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이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으니까, 이 세상으로 부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 작업이 다 헛된 것이 되고 실패작이 돼버릴 것이고, 교회가 온통 내세 신앙으로 굴러 떨어질 게 빤하니까,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이 세상으로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또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이 세상으로 오시겠다고 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세상만이 하나님이 창조한 유일무이한 세상이기 때문에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강림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고, 예수님이 다시 강림하실 이 세상을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 어떻습니까? 구약이 부활을 말하지 않은 이유가 신약이 부활을 말하는 이유이지 않습니까? 매우 역설적이지만 그렇습니다. 구약은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유일무이한 세상이기 때문에 부활을 말하지 않았고, 신약은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유일무이한 세상이기 때문에 부활만이 참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이 말해주는 최대의 진실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허무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유일무이한 세상이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최대 특징이고 하나님의 최대 특징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어떤 책보다도 이 세상을 긍정합니다. 하나님 또한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이 세상을 사랑하고 긍정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 많은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고,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최고의 증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