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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사무엘하12: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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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너무도 기이하고 낯선 사건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쉬 납득이 안 되는 황당한 사건입니다. 역사 안에서 역사를 넘어서는 종말적 생명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놀랍게도 이 사건이 성경대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15:4). 여기서 “성경”은 당연히 구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에 예고된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앞뒤맥락 없이 툭 튀어나온 사건이 아니고 구약성경에 뿌리가 있는 사건, 구약성경이 예고하고 있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 부활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뒷부분에 좀 나오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구약성경은 현세에서의 삶에 대해 말하지 내세에서의 삶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 영혼불멸에 대한 이야기, 부활에 대한 이야기 거의 없어요. 오직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야 할 삶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지 죽음 이후에 대한 이야기, 영혼불멸에 대한 이야기,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바울이 실수한 것일까요? 바울이 잘못 알고 엉뚱한 말을 한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성경의 최대 특징이 뭡니까. 정직성과 진실성입니다. 저는 성경보다 더 정직하고 진실한 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말(성경대로 부활했다)은 100% 진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정작 부활에 대해 거의 말이 없습니다. 구약에 많이 깔아놓으면 놓을수록 예수의 부활을 말하기가 편하니까 좋을 텐데 의외로 침묵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왜 구약은 부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추적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성경의 최대관심사가 이 땅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경이 죽음 이후의 삶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도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현세에서의 삶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땅에서 사는 삶 이외의 삶은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할 만큼 이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의외로 현세 중심적입니다.

 

영생을 말하고 구원을 말하는 성경이 왜 이렇게 현세 중심적일까요? 그 이유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창1:1).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보기 때문입니다(창2:2-3). 예, 성경은 이 세상을 물질덩어리로 보지 않습니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자연선택의 장’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이 세상)을 유일무이한 세상으로 봅니다.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이 세상이 유일무이한 세상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전부라고 봅니다.

그러니 감히 내세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혼불멸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걸 말하게 되면 곧바로 하나님의 창조가 우스워져버리고, 헛된 것이 돼버리고, 실패한 것이 돼버리는데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부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가 무너지거나 우스워지면 성경의 모든 것, 기독교의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 쉽게 말하지 않은 겁니다.

 

구약이 부활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성경만의 독특한 시각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필연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생명의 순리라고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빚어진 운명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맨 처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로 출발했는지를 말해주는 기막힌 표상입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영생을 표상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죽음을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두 나무가 에덴동산에 있다고 했을까요?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두 나무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인간에게는 본래 영생의 가능성과 죽음의 가능성이 다 열려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영생의 가능성과 죽음의 가능성을 다 가진 존재로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옳습니다. 인간은 영혼이 불멸하는 존재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존재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출발했을 뿐만 아니라 영생의 가능성과 죽음의 가능성을 다 가진 존재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뱀의 꾐에 빠져 죽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냈습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그리고 선포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무슨 말입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의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반드시 죽고, 한 번 죽음의 길을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됐다는 말입니다. 너는 본래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운명이 됐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말합니다. 먼저 극적인 사례 하나를 보겠습니다. 다윗은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방법으로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취하여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금식하며 밤새 땅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신하들이 말려도 꿈쩍하지 않고 땅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아이가 죽자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음식을 가져오라 해서 먹었습니다. 신하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어 몸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설명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12:22-23)

 

예,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성경의 기본 시각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것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아요. 죽음을 극화하지도 않습니다. 죽은 후의 좋은 곳으로 갔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계보를 보면 이 사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창세기는 아담의 계보를 말하면서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다, 셋은 912세를 살고 죽었다, 에노스는 905세를 살고 죽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고 죽었다, 라고 죽음을 아주 담백하게 기술합니다(창세기5장).

 

이스라엘의 시인들도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흙)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146:4)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6:5)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대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시115:17)

하나님의 사람 욥도 고난 속에서 탄식했습니다.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가운데 움이 돋고 자기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욥14:7-12)

최고의 지혜서인 전도서도 말했습니다.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9:5-6,10)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뵙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뵙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사38:11)

 

여러분,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죽음은 삶의 끝이라는 말입니다. 죽은 자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모든 감각도 사라지고, 당연히 지식도 없어지고 일도 없어지고 지혜도 없어지고, 죽음 후에는 어떤 형태의 삶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유일한 시각은 아닌데 어쨌든 성경은 기본적으로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봅니다. 한 번 죽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길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부활을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환생을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구약성경이 부활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성경의 기본 시각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계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봅니다.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온 세상이 더러워지고 일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라고 봅니다. 그런 만큼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서도 허무하다거나 비천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내세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은총이라고 봅니다. 죽음을 이 땅에서의 삶의 끝이라고 보고, 이 땅에서의 삶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예, 성경은 철저하게 현세 중심적입니다. 성경은 결코 내세 중심적이지 않아요. 지나칠 정도로 현세 중심적입니다. 성경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 있고, 이 땅에서의 삶에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이 내세에 대해, 영혼불멸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고, 부활에 대해서도 쉽게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생각해서 부활을 말하지 않은 게 아니고, 모든 관심이 철저하게 현세 중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부활을 말하기 위해서 부활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성경대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견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서 부활을 말하지 않은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