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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2-왜곡되거나 폐기된 부활

2019.02.17 15:16

정병선 조회 수:137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누가복음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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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3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난 사건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고 기독교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려면, 기독교 신앙의 실체와 근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부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속으로 들어가야만 우리의 신앙이 종교적인 겉치레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구원 공식에 갇히지 않을 수 있고, 자기중심적인 기복신앙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적인 겉치레 신앙,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구원 공식에 갇힌 신앙, 자기중심적인 기복신앙, 이 세 가지가 기독교 신앙을 좀먹는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이 세 가지 신앙의 적을 넘어서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부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워낙 독특한 사건이기 때문에, 어떤 유비도 불가능한 아주 기이하고 낯선 사건이기 때문에, 또 부활의 현실성이 아직은 충분히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고, 부활의 현실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속으로 들어가려하지 않습니다. 어렵고 골치 아픈 일을 만나면 일단 피하는 게 인간의 습성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못 본 척 외면하고 슬쩍 피해버립니다. 더욱이 하나님이니, 구원이니, 부활이니 하는 것들은 실용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몰라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부활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부활의 현실성 속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이해는 안 되지만 그냥 믿어요. 믿음으로 슬쩍 넘어갑니다. 그러다 보니 부활을 엉뚱하게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많고, 부활을 아예 부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실상을 좀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부활을 엉뚱하게 잘못 이해하는 경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부활’이라는 말은 꽤 널리 쓰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상관없이, 예수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널리 쓰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나 정부 조직에서 어느 부서를 없앴다가 다시 만들면 ‘부서가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완전히 무너질 위기, 죽을 위기를 넘기고 일어날 때도 ‘부활했다’는 말을 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부활’이라는 드라마가 있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소설에도 ‘부활’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심지어 ‘부활’이라는 그룹사운드도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이라는 말이 상당히 널리 쓰이는데,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말을 보통 두 가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말을 500년간 살다가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어 재가 되고 그 후 다시 환생한다는 전설 속의 ‘불사조’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결코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부활을 이해합니다. 둘째로 사람들은 ‘부활’이라는 말을 후세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오래도록 기억하거나 죽은 사람의 영향력이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황교안 전 총리가 지난 9일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신지 벌써 39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모두에게 존경받으며 국민통합의 지도자로 살아계신다.”고 말한 것 속에도 그런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부활을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요. 그러나 부활은 이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죽은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보관하는 장례문화가 있었습니다. 또 여러 나라에는 죽은 자를 장사지낼 때 부장품을 함께 묻는 장례풍습이 있었습니다. 죽은 자가 저승에서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필요한 물품들을 같이 매장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생필품을 비롯해서 짐승이나 하인들을 함께 매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아내까지 죽여서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국 요크셔에서는 유아의 무덤에서 흑옥으로 만든 장난감 모형 곰이 들어있는 무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부활 신앙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세기에 기독교를 엄청 비판했던 켈수스는 기독교의 부활을 환생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한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집트의 미라 관습을 부활 신앙의 증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런 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고대인들이 시신을 미라도 만들어 보관하고 부장품을 함께 묻는 풍습을 행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삶이 다 끝나는 게 아니라 저승에 가서도 구체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영혼은 불멸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주전 6세기 그리스의 시인인 핀다로스는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며 불멸하는 영혼은 몸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몸이 사라진 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후에 하데스(지하세계, 음부)에서 돌아오지 않는 것도 거기에서의 삶이 너무 좋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거기에 머물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톰 라이트.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98쪽). 플라톤은 이런 영혼불멸 사상을 영육 이원론을 체계화한 후 죽음을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죽음을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부활을 영혼불멸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영혼불멸이 전혀 아닙니다.

 

지금까지 부활을 엉뚱하게 잘못 이해한 경우를 살펴봤습니다. 이제는 부활을 아예 부정하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환생이라든지 윤회라든지 영혼불멸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정반대로 한 번 죽은 사람은 결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죽은 사람을 가리켜 ‘불귀의 객’(不歸의 客)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한 번 죽은 사람은 절대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는 [유메니데스]라는 작품에서 아폴로가 아테네 최고의 법정인 아레오바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어서 먼지가 그의 피를 빨아들인 후에는 부활이란 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아들에게 ‘아무도 네 아버지를 하데스(지하세계)로부터 다시 불러올 수 없다’고 설득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걸 보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우리 조상들처럼 죽음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는 철저한 유물론자였습니다. 이들은 영혼까지도 지극히 정교한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육체가 죽을 때에 영혼까지도 분해되어 사라진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에는 이런 생각이 더 보편화됐습니다. 예일 대학교에서 17년 동안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강의한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은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놀라운’ 기계 -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일 뿐이다.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나듯이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가 아니라 컴퓨터가 고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죽음은 단지 삶의 끝일뿐이다.”라고 말합니다(죽음이란 무엇인가. 346,506쪽).

이들은 한 결 같이 부활을 부정합니다. 부활 같은 건 애당초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활 같은 건 애당초 없으니 이 땅에서의 삶을 최대한 즐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부활은 엉뚱하게 잘못 이해된 경우도 있었고, 부활 같은 건 아예 없다고 부정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 중에도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고, 부활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신학자와 목회자 중에도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고, 부활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의 무엇과도 유비가 불가능하고 검증이 불가능한 매우 기이하고 낯설고 독특한 사건이기 때문에, 더욱이 예수님이 단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과거의 생명으로 복귀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생명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종말의 날까지는 완전하게 경험할 수 없는 생명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부활을 잘못 이해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고,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4장에서 이 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났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 첫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 여러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를 요량으로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순간 여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두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지금 생명을 죽음 속에서 찾고 있는데 그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생명은 죽음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죽음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지금 이 세상은 죽음이 왕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겉으로 보면 살아있는 자들이 살고 있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거대한 무덤입니다. 죽은 자들이 우글거리는 무덤이에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는 것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찾을 수 없습니다. 첨단 과학을 총동원해도 절대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부활이 없다고 헛소리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아지지 않으니까 부활이 없다고 헛소리 하는 것이고, 부활을 엉뚱하게 잘못 상상하고, 잘못 추측하고,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부활생명은 무덤 속에 있을 수 없는 생명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생명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입니다. 종말의 날까지는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경험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당신의 아들에게 이런 생명을 주셨습니다. 종말적 생명을 종말이 오기 전에 예외적으로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당신의 아들에게만 예외적으로 종말적 생명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이 부분을 탐색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