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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죽음의 간극

2019.01.20 20:39

정병선 조회 수:148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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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햄릿]을 통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 that is the Question)라고 탄식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그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요즘 사람들은 보통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와 행복과 불행이라는 잣대로 판단합니다.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는 객관적인 잣대(사회적인 잣대)이고, 행복과 불행이라는 잣대는 주관적인 잣대(내면적인 잣대)인데 거의 이 두 잣대로 ‘잘 살았니 못 살았니’ 판단합니다. 마치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행복하게 살았느냐 불행하게 살았느냐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거기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들 그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행복하게 살았느냐 불행하게 살았느냐는 잣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의외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행복하게 살았느냐 불행하게 살았느냐에 별 관심이 없으세요.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시는 것은 ‘생명을 살았느냐 죽음을 살았느냐’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없는데 하나님은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십니다. 당연히 각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실 때도 ‘생명을 살았느냐 죽음을 살았느냐’는 잣대로 판단하십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느냐,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생명을 살았느냐 죽음을 살았느냐로 판단하십니다.

 

생명을 사는 것과 죽음을 사는 것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하늘과 땅이 다른 것만큼이나 모든 것이 다르고 전적으로 다릅니다. 날마다 활기차게 사는 것, 무슨 일을 하든지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하는 것, 일상의 신비를 민감하게 느끼며 사는 것,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사는 것,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다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대로 가난한 심령으로 사는 것, 죄와 어둠을 애통해하며 사는 것, 온유한 마음으로 사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사는 것, 긍휼히 여기며 사는 것, 청결한 마음으로 사는 것, 화평케 하는 자로 사는 것, 핍박에도 불구하고 의를 위하여 사는 것이 다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마5:3-10).

십계명을 지키는 것도 생명을 사는 것이고(출20:3-17),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도 생명을 사는 것이고(갈5:22-23),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고,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범사에 감사하고,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도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골3장).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참~ 좋다’고 생각하는 것,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의 청초한 자태를 보고 감탄하는 것, 소박한 밥상을 앞에 놓고 감사기도 하는 것도 다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죽음을 사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몇 년 전에 유행한 ‘헬 조선’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우리 모두가 날마다 보고 경험하는 현실이 곧 죽음(지옥)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익숙합니다. 우리가 매일 보고 경험하는 삶이 곧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등 돌리고, 불신하고, 정죄하고, 속이고, 원수 맺는 것들이 다 죽음을 사는 것이에요. 돈 좀 있다고, 힘 좀 있다고 갑질하는 것, 온갖 불의를 일삼는 것, 추악하고, 탐욕스럽고,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하고, 죽이고, 편을 갈라 싸우고, 사기치고, 독기가 가득하고, 비방하고, 능욕하고, 교만하고, 자랑질 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우매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들이 다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롬1:29-31).

 

방금 나열한 죽음살이 목록을 보십시오.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리 덕스럽지 않습니다. 그저 혐오스럽고 추악하고 괴물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사는 것이 꼭 혐오스럽거나 추악하거나 괴물스럽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죽음을 사는 일은 의외로 멋지고 위풍당당하고 짜릿합니다. 심지어 휘황찬란하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행복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세상에서 누가 인정을 받고, 누가 많은 보상을 얻습니까? 생명을 훌륭하게 살아낸 사람이 인정과 보상을 받습니까, 죽음을 훌륭하게 살아낸 사람이 인정과 보상을 받습니까? 두 말할 것 없이 죽음을 훌륭하게 살아낸 사람이 인정을 받고 보상을 받습니다. 죽음을 훌륭하게 살아낸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주고, 온 삶을 바쳐 죽음의 체제에 충성한 사람에게 성공이라는 면류관을 씌워줍니다. 죽음의 체제에 자기 삶을 맞추고 충성한 사람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을 몰아줍니다. 오늘의 세상은 생명을 훌륭하게 살아낸 사람이 얻고 누리는 세상이 아니에요. 죽음을 훌륭하게 살아낸 사람이 많은 것을 얻고 누리는 세상입니다. 죽음을 훌륭하게 살아낸 사람이 행복을 노래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이렇다 보니 생명을 사는 일에 뛰어드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생명을 사는 일에 관심을 갖고 일평생 정진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다들 죽음을 사는 일에 뛰어듭니다. 생명을 사는 것보다는 죽음을 사는 것이 훨씬 화려하고 매력적이고 짜릿하고 위풍당당하고 심지어 우아하기까지 하니까, 생명을 사는 사람보다는 죽음을 사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높은 자리 차지하고 행복을 노래하니까, 죽음을 훌륭하게 살아낼수록 많은 것을 얻고 누리니까, 사람들이 다들 제정신을 잃고 죽음을 살기 위해 질주합니다. 죽음을 사는 일에 투자합니다. 생명을 사는 일에는 투자하지 않아요. 시간도 투자하지 않고 돈도 투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죽음을 사는 일에 투자합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훌륭하게 살아낼 수 있도록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훈련시키느라 모든 걸 투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은 생명을 사는 것 아닙니다. 그들의 삶이 화려하고 매력적이고 짜릿하고 위풍당당하고 우아하고 행복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사는 것은 이렇게 화려하거나 매력적이거나 짜릿하거나 위풍당당하거나 우아하지 않습니다. 멋지거나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생명을 사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이고 어찌 보면 밍밍하기까지 합니다. 콜라 맛에 가깝기보다는 물맛에 가깝습니다.

죽음을 사는 것과 생명을 사는 것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살아가는 내용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고, 살아가는 태도도 다르고,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깊이도 다 다릅니다. 물론 코로 숨 쉬고, 하루 세끼 밥 먹고, 일하며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생명을 사는 것이나 죽음을 사는 것이나 사는 모습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똑같아요. 그러나 생명을 사는 것과 죽음을 사는 것은 숨 쉬는 것부터 옷 입고 밥 먹는 것까지 깡그리 다릅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과 서로 미워하며 사는 것은 똑같이 숨 쉬어도 숨 쉬는 게 달라요. 서로 신뢰하며 사는 것과 서로 불신하며 사는 것은 똑같이 일해도 일하는 게 달라요.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완전히 다릅니다.

이처럼 생명을 사는 것과 죽음을 사는 것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토록 이 문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살지 말고 생명을 살라고 쉼 없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명을 사는 것과 죽음을 사는 것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무엇이 달라서 어떤 생명은 생명을 살고 어떤 생명은 죽음을 사는 것일까요? 각 사람의 자질이나 기질이나 능력이 달라서일까요? 신앙심이 달라서일까요? 아니면 종교나 사상이 달라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을 사는 것과 죽음을 사는 것의 차이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사느냐 관계없이 사느냐, 하는 하나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요6:48). 내가 생명의 문이다(요10:9).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맞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입니다. 생명은 사람 안에 있지 않아요. 물이나 공기나 불이나 흙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나 도덕이나 종교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고, 예수님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명이고, 예수님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나 노력으로는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이 내 것이라면 내 맘대로 내 의지대로 생명을 살 수 있겠지만, 생명이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맘대로 내 의지대로 생명을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용을 쓰고 마음을 다진다고 해서, 인격을 단련하고 지혜를 쌓는다고 해서, 신앙심을 돈독하게 한다고 해서 생명이 살아지지 않습니다. 어떤 기술이나 방법을 배웠다고 해서 생명이 살아지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살고 내가 예수님 안에 살아야만, 매순간 생명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드나들어야만 비로소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 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이지 우리가 포도나무는 아닙니다. 우리는 포도나무가 아니고 가지일 뿐이에요.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가지일 뿐이기 때문에 생명을 살려면 좌우지간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좋든 싫든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돼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설명한 생명의 대원칙입니다. 생명의 대원칙은 아주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생명을 살고 붙어 있지 않으면 죽음을 삽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지 않은 채로 자기 힘으로 살면 이런저런 것들이 불만스럽고, 자꾸 나만 상처받는 것 같고, 살다보면 왠지 미워지고, 그래서 싸우고, 등 돌리고, 불신하고, 정죄하고, 툭하면 자랑질하고, 원수를 맺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감사하게 되고, 그래서 삶의 활기가 살아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콧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배려하고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게 됩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나오면 몸을 비틀고 펄떡거리지만 물속에 들어가면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과 조화를 이룰 때 자유롭고 평안하고 즐겁고 생기가 돋고,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과 어긋날 때는 뭔가 두렵고 불안하고 공허하고 우중충하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대원칙이고 생명을 사는 대원칙입니다.

그런 면에서 생명을 사느냐 죽음을 사느냐는 개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이나 기질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느냐 맺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실 생명을 사는 것은 지극히 쉽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사는 길을 어렵게 만들지 않으셨어요. 누구나 생명을 살 수 있도록 아주 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만물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의 그물망을 인정하고 존중하기만 하면 누구나 생명을 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부는 곧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사람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부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랑해야 할 유일한 부 또한 생명입니다. 생명을 사는 것이 진짜 부자로 사는 것이고, 생명을 사는 것이 알짜 인생을 사는 것이고, 생명을 사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일에 최우선순위를 두시기 바랍니다. 만물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의 그물망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사는 것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성공하는 것이나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생명을 사는 것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정녕 생명을 사는 진짜 부자가 될 것입니다. 정녕 생명을 사는 알짜 인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