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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역설

2019.01.13 15:30

정병선 조회 수:158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요한복음1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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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듣습니까? 보통은 자기를 희생하라는 이야기로 듣습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와 같은 말씀으로 듣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생명의 이치이니 자기만 살겠다고 고집하지 말고 자기를 내어주고 희생해라,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아니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하신 말씀 ‘생즉사 사즉생’(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산다)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죽을 각오로 임하면 어떤 적과 싸워도 승리할 수 있으니 병사들이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고 외친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말씀도 그런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이 과연 그런 차원의 이야기일까요? 자기 생명을 희생하면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무슨 일이든 죽을 각오로 임하면 해낼 수 있으니 매사에 죽을 각오로 임하라는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저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 무엇을 하든지 죽을 각오로 임하는 것이 훌륭한 삶의 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 마음과 태도로만 산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는 길이 열릴 것이고, 상당한 성과를 얻을 것이라는 건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차원에서 말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실용적인 차원에서, 손자병법이 말하는 것이나 자기계발 강사들이 말하는 것 정도의 차원에서 말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 즉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깊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할 것’이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눈 여겨봐야 할 문구가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이라는 문구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생명을 사랑하는 자’,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고 하지 않고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라고 토를 붙였습니다. 왜 ‘생명을 미워하라’고 하지 않고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라’고 토를 붙였을까요?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말씀했습니다. ‘아담아, 너는 나를 닮은 자유자다. 그러니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어도 돼.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저 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먹으면 안 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창2:16-17).

하나님은 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하셨을까요?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에 무서운 독이라도 있어서일까요? 아담은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시니까, 그 열매 속에 무서운 독이 있다는 것을 아시니까, 아담의 생명을 지켜줄려고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려고 그런 겁니다.

 

모든 성경 이야기가 그런 것처럼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도 그렇게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생명에 대한 깊고 풍부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풀어서 말하면 이런 메시지입니다.

‘아담아! 지금 네 심장이 뛰고 있지? 네 안에서 생명이 펄떡이고 있지? 네 아내의 생명도 펄떡이고 있고, 수많은 동식물의 생명도 펄떡이고 있지? 네가 보기에는 각각의 생명체들 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네 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저 호랑이 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생명이란 제각각 독립된 실체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다. 네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다. 생명은 네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과 달리 독립된 실체가 아니야. 생명이란 창조주인 나를 신뢰하고 내 말을 듣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지 너라고 하는 독립된 실체 속에 있지 않아. 그리고 생명이란 독립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네가 독립된 실체로 살아가는 순간 너는 반드시 죽게 된단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명을 살지 못하고 죽음을 살게 된다는 뜻이야.’ 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한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 지혜와 판단과 감정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가 생명의 주인이 되어 산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자기가 생명의 주인이 되어 산다는 것은 생명을 독립된 실체로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이 바로 이겁니다. 단지 선악과 먹지 말라는 게 아니고 생명을 자기 것이라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이라고, 독립된 실체라고 생각하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생명의 현실이 이렇습니까?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생명의 현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릅니다. 모든 생명이 개별적이에요. 내 생명이 따로 있고, 네 생명이 따로 있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네가 죽지 않아요. 내가 죽는다고 자식이 죽지 않아요. 심지어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고 떠나도 끄떡 안 합니다. 심장이 잘만 뜁니다. 생명이 펄떡펄떡합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생명은 이렇게 개별적이에요. 실체적이에요. 이것이 눈에 보이는 생명의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내남없이 생명을 독립된 실체라고 생각하고 독립된 실체로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기에는 생명이 내 안에 있는 것 같고, 독립된 실체인 것 같지만 생명은 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여호와를 신뢰하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어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과 마주할 때,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생명과 내 생명이 잇닿아 있을 때, 바로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거꾸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생명, 하나님과 마주하지 않는 생명,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생명, 하나님의 생명과 잇닿아 있지 않은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이 생명은 죽음에 갇힌 생명이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생명이고, 죽음을 사는 생명이지 생명을 사는 생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 속에는 과학이 담겨 있지 않고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인 존재, 궁극적인 생명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자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이것이 창조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결국 창조 이야기와 선악과 먹지 말라는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모든 존재와 생명은 각자의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와 생명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존재와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요 관계적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와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요 관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네가 존재와 생명을 소유하게 되면, 네가 존재와 생명의 실체가 되면, 그 순간 네 존재와 생명은 죽음에 갇히게 된다, 죽음의 체제에 복무하게 된다. 죽음을 살게 된다.’ 이것이 창조 이야기와 선악과 먹지 말라는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이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 메시지를 세심하게 듣고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의 체제에 갇힌 비참한 삶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습니까? 귀 기울여 들었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신뢰했습니까? 정 반대로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자기가 생명의 주인이 되어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생명이 죽음에 갇히게 됐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순간 심장이 멈춘 건 아니지만 죽음에 갇힌 생명으로 추락해버렸습니다. 형(가인)이 동생(아벨)을 죽이는 추악하고 비천한 생명으로 추락해버렸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아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아담이거든요. 맨 처음 아담만 아담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도 다 아담입니다. 그리고 아담인 우리는 하나같이 죽음에 갇힌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한없이 비참하고 누추하고 추악하게 일그러진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에 갇힌 생명의 비참함 때문에 절망하며 살고, 어떤 사람은 죽음에 갇힌 생명인 줄도 모른 채 치열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이런저런 고민 없이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살고, 사는 모양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가 똑같이 죽음에 갇힌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살든 비도덕적으로 살든, 양심적으로 살든 비양심적으로 살든, 치열하게 살든 대충 살든, 이타적으로 살든 이기적으로 살든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가 죽음에 갇힌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죽음의 체제에 복무하며 살고 있습니다. 죽음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여자 선수가 초등학교 때부터 코치에게 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습니다. 이러다가는 죽겠다는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한 폭력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성폭행까지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한 마디로 금메달을 따기 위해 죽음의 체제에 복무한 것입니다. 선수, 코치, 감독, 체육계 종사자들 모두가 금메달 사냥을 위해 죽음에 갇힌 삶, 죽음의 체제에 복무하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물론 이들만 그런 건 아닙니다. 아이돌 스타부터 유치원생까지 우리 모두는 누가 더 죽음살이를 잘 하느냐, 누가 더 멋지게 죽음살이 정상에 오르느냐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은 일등 경쟁, 선수는 메달 경쟁, 청춘은 취업 경쟁, 회사원은 연봉 경쟁, 기업은 매출 경쟁, 연예인은 인기 경쟁, 정치인은 권력 경쟁, 국가와 국가 간에는 무기 경쟁 등등 온통 죽음살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살이 경쟁에서 승리한 것을 성공이라 하고, 성공한 자에게 부와 명예 등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서 끝없은 죽음살이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훤히 꿰뚫어 아시고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이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자기를 희생하면 많은 열매를 얻을 것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아라, 정도의 실용적인 말씀이겠습니까? 그렇게 시시한 말씀을 하실 예수님이 아니죠. 예수님 말씀은 이보다 훨씬 심오하고 풍부합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생명의 신비와 생명의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의 생명’은 어떤 생명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두 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생명과 자기의 생명이 잇닿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생명, 자기가 주인이 되어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생명, 독립된 실체로서의 생명, 죽음에 갇힌 생명, 제가 항상 말하는 죽음살이하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생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보기에는 참 생명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생명입니다. 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죄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세계가 곧 지옥입니다. 나, 나, 나, 나, 나밖에 없는 세계, 내가 최고인 세계, 내가 주인이고 왕인 세계가 곧 지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 이것이 생명의 진실이고 생명의 역설입니다. 생명은 자기 것이 되는 순간 죽음에 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떠나는 순간 생명으로서의 생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진실을 아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게 됩니다. 죽음에 갇힌 생명, 죽음의 체제에 복무하는 생명, 죽음살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생명은 참 생명, 온전한 생명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 생명은 한없이 비참하고 누추하고 추악한 생명임을 알기 때문에, 죽음살이에 열심일수록 죽음에 더 가까이 갈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진심으로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참 생명, 온전한 생명, 죽음의 체제에서 해방된 생명, 죽음의 체제를 넘어선 생명, 자기 안에 갇히고 죽음에 갇힌 생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열려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열립니다.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참 자유의 삶이 스르르 열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 것도 주저하지 마시고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고,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자 근원 진실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생명의 진실입니다. 날마다 이 근원 진실 위에 서서 일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