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logo

서브이미지
subtitle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마가복음2:13-17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81223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81223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h0laZlB8DPI

 

  (MP3 듣기: 2018년 12월 23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h0laZlB8DPI

 

오늘 읽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레위입니다. ‘레위’라는 이름에는 ‘함께 연합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아내 레아가 셋째 아들을 낳고서 ‘내가 세 아들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여 연합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레위’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창29:34).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의 아버지 알패오도 막 태어난 아들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서로 연합하여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레위’라는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의 인생은 이름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직업이 로마 황제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금 징수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유대를 점령한 나라는 로마였는데, 로마 당국은 로마인을 파견해 세금을 걷지 않고 현지인 중에서 세금 징수원을 뽑아 세금을 거두게 했습니다. 레위가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동족에게 가혹한 세금을 징수해 로마 황제에게 갖다 바치는 일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민족을 배신한 자라는 멸시와 수모를 얼마나 많이 겪었겠습니까? 실제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세관원들을 죄인이나 이방인처럼 취급했다고 합니다. 율법 해설서인 <미쉬나, Mishnah>에도 세리에게 가서 돈을 환전하면 안 된다, 세리는 법정의 증인이 될 자격이 없다, 세리의 돈을 구제금으로 받으면 안 된다는 규례들이 나온다고 해요. 심지어 거지조차도 세리가 주는 돈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보면 레위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하루하루 사는 게 정말 가시방석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또 잘하면 돈도 벌 수 있고 출세할 수도 있으니까 로마 황제를 위해 세금을 거두고는 있지만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번민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레위에게 다가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간 말종’ 취급을 받는 그 사람, 먹고 살기 위해 동족의 피를 쥐어짜는 그 사람, 번민과 갈등으로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인 그 사람에게 다가가 ‘나와 함께 하자. 나와 함께 진리의 길을 가자, 생명의 길을 가자’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레위는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벌레 보듯 하는데 예수님이 다가와 손을 내미니까 낯설기도 하고 황송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민 손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황송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예수님이 내민 손을 꽉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말할 것도 없고 동료 세관원들까지 다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마가는 이 장면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행 중에는 죄인이 많이 있었다’고 콕 집어서 말했습니다(2:15). 이것은 예수님이 세리의 집에 가서 많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을 바리새인들이 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유대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현장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곧바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님은 이 말을 듣고 바리새인들에게 촌철살인과 같은 한 마디를 날렸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7)

참 선문답 같은 이야기지요? 그러나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이 선문답을 통해 자기들의 정체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바리새인은 죄인을 함께 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배제했습니다. 죄인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경건치 못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죄인이야말로 자기가 함께 해야 할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죄인과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경건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사실 바리새인이나 예수님이나 똑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고 모세의 율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는 정반대였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이 예수님을 믿고, 똑같이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관점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이 다른 것처럼 완전히 다른 경우가 참 많아요. 과연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일까요?

 

일단 이 의문을 던져놓고 예수님 말씀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한 걸까요? 예수님이 건강한 자, 깨끗한 자는 미워하시고 병든 자, 더러운 자는 사랑해서일까요? 아니면 병든 자, 더러운 자가 불쌍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라야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병든 자를 치유하고, 더러운 자를 용서하여 깨끗케 하러 왔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서로가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배제하는 이 세상, 서로 미워하고 갈라지고 싸우며 살아가는 이 세상, 만인이 만인과 전쟁하듯 살아가는 이 세상을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세계로 회복시키러 왔기 때문입니다. 예, 예수님은 병든 자, 무력한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더러운 자를 치유하고 구원하러 왔습니다. 정죄와 대립과 배제가 만연한 세상을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세계로 재창조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조건 치유됩니까? 예수님 말씀을 들었다고 사람이 무조건 회개하고 구원받나요? 어림도 없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고, 아무리 예수님이 달려들어 치유하려 해도 ‘나는 건강하고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절대 치유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구원하지 못해요. 그러면 누가 치유 받고 구원 받을까요? 나는 병든 자요, 부패한 자요, 어둠에 갇힌 자요, 죄의 종노릇하는 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옆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벌립니다. 자기 안에 허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납합니다.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야 책을 읽고 공부합니다. 자기가 허약한 것을 알아야 건강에 신경 씁니다. 자기가 피조물인 것을 알아야 창조자 앞에 무릎 꿇습니다. 자기가 불의한 자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입니다. 예, 사람은 그래요. 나는 병든 자요, 부패한 자요, 어둠에 갇힌 자요, 죄의 종노릇하는 자라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닫고 인정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나는 병든 자요, 부패한 자요, 어둠에 갇힌 자요, 죄의 종노릇하는 자라는 것을 뼛속 깊이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들이 모인 교회는 어떤 곳이겠습니까? 건강하고 깨끗한 자들이 모인 공동체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병든 자요, 부패한 자요, 어둠에 갇힌 자요, 죄의 종노릇하는 자라는 것을 뼛속 깊이 아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나는 병든 자요, 부패한 자요, 어둠에 갇힌 자요, 죄의 종노릇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행하신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받아들인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죄인들이 용서받음에 기초해서 피차 화해하고, 화해에 기초해서 함께 평화의 삶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제가 기회 있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구원은 죽은 후에 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한 것,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잘나가는 것, 경건의 훈련을 잘 받아 정결하고 깨끗한 것이 구원의 증표가 아닙니다. 수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들을 구원의 증표라며 간증하고 내미는데 이런 것들은 구원의 증표가 아니에요. 구원의 증표는 예수님의 용서를 통해 죄와 어둠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용서받음에 기초해서 피차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에 기초해서 평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구원이고, 이것만이 구원의 증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금과 은을 주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힘, 능력, 복지, 도덕을 주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주려고 왔습니다.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도 사실은 금, 은, 힘, 능력, 복지, 도덕이 아닙니다. 이런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용서, 화해,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용서, 화해, 평화이기 때문에 그것을 선물하려고 오신 겁니다. 예, 용서, 화해, 평화가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온 최상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에 부어준 최상의 축복 또한 용서, 화해, 평화입니다. 또 서로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과 다름을 용납하고, 서로 화해하고 평화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다른 건 부족해도 용서, 화해, 평화는 넘쳐야 합니다. 금과 은은 부족해도 돼요. 힘과 능력은 부족해도 됩니다. 그러나 용서, 화해, 평화는 넘쳐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니까, 이것이 십자가로 이룬 구원이고, 사람을 살리고 삶을 회복시키는 능력이니까 다른 건 부족해도 용서, 화해, 평화는 넘쳐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돈이 부족한 것 같습니까? 힘이 부족한 것 같습니까? 신앙심이 부족한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교회가 태반이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교회에는 금과 은이 넘칩니다. 힘과 능력도 넘칩니다. 반면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는 너무 부족합니다. 주변에 보세요. 선교에 힘쓰는 교회 꽤 있습니다. 구제에 힘쓰는 교회도 적지 않고, 사회정의에 힘쓰는 교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사는 일에 힘쓰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교회가 힘써야 할 진짜 책무이고, 교회가 품어야 할 진짜 비전인데 이 일에 힘쓰는 교회는 거의 없어요. 교회에 넘쳐야 할 진짜 보화는 금과 은이 아니라 용서, 화해, 평화인데 이 보화가 넘치는 교회는 거의 없어요. 그리스도인 안에도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능력이 넘쳐야 하는데 이 능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최근에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우상숭배 하듯 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 안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고 심히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이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또 이토록 소중하고 긴급한 일에 집중하지 못한 것이 심히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요즘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아 있는 시간만큼은 이 일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족하지만 피차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의 삶을 사는 일에 마음과 기도를 모읍시다.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고, 서로의 부족함과 다름을 용납하고 화해하면서 평화의 삶을 사는 일에 신앙생활의 최우선순위를 두고 힘씁시다. 저는 용서와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사는 것이 곧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사는 것을 꿈꾸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진짜 비전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