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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14-이제는 율법 외에

2018.10.07 16:16

정병선 조회 수:93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로마서3:19-30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81007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81007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QEFmMFKkeIg

 

  (MP3 듣기: 2018년 10월 7일 주일예배설교)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QEFmMFKkeIg

 

이제야 철이 는 것인지, 아니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 말씀을 이제야 깨닫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언제부터인지 인생이 참 쓸쓸하고 슬픈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세상은 가을이 무르익어가면서 아름다움도 깊어가고 하나님의 사랑 또한 흘러넘치는데 인생은 왜 그리도 허망하고 쓸쓸한지요. 특히 함께 한다는 것처럼 쓸쓸하고 슬픈 일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듭니다. 이 시대의 젊은 문학 비평가 신형철도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70쪽)라고 자조하듯 내뱉었습니다만, 모든 인간이 자기중심성에 갇혀 있는 죄인이고,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인간관계는 근본적으로 파괴된 관계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생을 사는 일, 함께 하는 일은 쓸쓸하고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도 하나님나라 복음을 말하면서 인생의 비극성에 대해 지겨울 정도로 말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말했습니다만 바울은 하나님나라 복음을 증언하면서 제일 먼저 인간의 불의함에 대해 폭로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적 실상을 가감 없이 폭로하고 드러냈습니다. ‘인간이 하는 짓은 너무나 자명하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헬라인이나 모두가 죄를 짓고 악하게 산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무가치하게 산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혹 찾더라도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이 있었지만 특권을 감당하지 못했고,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 속에서 멸망의 길을 걸었다, 모든 인간의 삶은 파괴됐으며 어디에도 해결책이 없다.’고 비극적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무슨 말입니까? 율법으로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하는 일이란 고작 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해줄 뿐이라는 겁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도망치거나 변명하거나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바울은 왜 인간의 불의함과 삶의 비극성을 말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율법(법)을 거론했을까요? 그것은 법과 정의의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한 일을 당할 때 어디에 탄원합니까? 이래도 안 풀리고 저래도 안 풀릴 때 최종적으로 탄원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법입니다. 법에다가 호소하고 법정에다가 탄원합니다. 사람들은 법이 정의로운 판단의 최종 규범이라고 믿기 때문에, 법이야말로 정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최고의 규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면 법에 탄원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법과 정의를 거의 동일시합니다. 법이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무너지면 정의가 무너지고, 법이 바로 서면 정의가 바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다스리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마다 법이 있고, 법원이 있고, 법을 만드는 입법 기관이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법이 정말 정의의 마지막 보루일까요? 법이 바로 서면 정의가 바로 설까요?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선을 긋습니다. 법은 죄를 알게 할 뿐이지 의를 실현하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만든 법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최상의 의의 법)으로도 의가 실현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말해주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가까이 했습니다. 그러나 의를 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 똑같이 죄를 지었을 뿐이지 의를 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뭘 말해줍니까? 법은 의를 가능케 하지 못한다는 걸 말해줍니다. 법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걸 말해줍니다. 물론 여기서 일차적인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닙니다. 바울이 3장 20절에서 율법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따라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1장 18절부터 3장 18절에 걸쳐 충분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3장 20절에서 다시 율법 문제를 꺼낸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한 것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법(율법) 자체의 문제를 따지려고 그런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법과 정의의 관계를 따져보려고 꺼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사람들은 법이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바로 서면 정의가 바로 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 생각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보려고 율법 문제를 다시 꺼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말을 꺼낸 것은 ‘율법을 따라 행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일 뿐이지 의를 행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요청하는 의(정의),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정의)는 결코 법에서 나오지 않는다. 법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입니다. 법과 의 사이에는 넘지 못할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가장 근접한 것이 그래도 율법인데 율법마저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참된 길이 되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처럼 율법은 의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모두가 놀랄 반전 카드를 꺼냅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롬3:21) 이 말은 1장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던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반복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앞뒤 내용을 연결했고,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율법 외에’를 덧붙였습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에는 ‘그러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본에는 ‘이제는’ 앞에 ‘그러나’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나’를 붙여서 읽어야 앞뒤 문맥이 잘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그러나’라는 접속사에는 앞에서 말한 것들이 다 담겨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이 없었다.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조차도 의에 이르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다 불의한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 지금까지는 그랬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 도래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지금까지는 율법이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데 율법과 상관없이 율법 밖에서 하나님의 의가 흘러들어왔다. 율법과 상관없이 의에 이르는 길이 열렸다.” 이것이 3장 21절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요지입니다. 나머지는 이 말에 대한 보충 설명이에요.

 

바울은 이렇게 보충설명을 합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마치는 하나님의 의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롬3:22-24)

여기서 바울은 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의와 무엇을 연결했습니까? 의와 법을 연결했습니다. 법이 곧 의라고 생각했고, 법이 곧 의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엉뚱하게 의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역사 속에 흘러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율법을 행함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v.27).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의는 거저 주어진 선물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행하신 무조건적인 용서와 환대로써 그냥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 엄청난 반전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낯선 방식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에게는 이미 예고됐던 방식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율법 밖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이 방식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v.21)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냄 받은 선지자들이 한 말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가리키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윗과 맺은 언약이 가리키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사야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때가 되자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언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역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인류의 죗값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역사 속에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율법 밖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야겠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두 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의 핵심이요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불의로 가득한 이 세상, 죄와 죽음의 종노릇하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이 세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법적 정의도 아니고, 윤리적인 선도 아니고, 개개인의 행복도 아니고, 물질의 부요함도 아니고, 무병장수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의가 없는 것이 이 세상의 가장 큰 문제이자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고, 그런 만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소식이야말로 가장 복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문제,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의 없음’(불의)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가져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는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현존합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교리가 아닙니다. 점술가들이 뇌까리는 주문(呪文)이 아닙니다.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고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역사 속에서 행하시고 성취하신 사건이고 사실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결코 바뀌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사건,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무찌른 사건, 남과 북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전쟁한 사건, 세월호 사건을 우리 맘대로 바꾸거나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 사건도 우리 맘대로 바꾸거나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 년 전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의도 인간에 의해서 취소되거나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미 세상의 현실이 됐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있고, 우리 안의 불의와도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의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할 때 ‘믿음’을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네가 이것 잘못했거든? 그러니 사과해. 네가 잘못한 것을 사과하면 용서해줄게’라고 할 때 사과는 용서의 조건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도 의롭다 함을 얻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런 의미로 믿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조건이 충족돼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네 행위와 상관없이 네 밖에서 나타났어,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이미 역사의 현실이 되었어, 네 행위와 상관없이 너에게 주어졌단 말이야, 그러니 너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은 ‘믿음이라는 조건이 충족돼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 덕분이야’를 강조하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지금껏 한 번도 실행하지 못한 일이긴 한데, 하여간 제가 아내를 위해 정성껏 케이크를 구웠다고 해봅시다. 인류 제빵사가 만든 것처럼 정성껏 케이크를 만들어서 아내에게 ‘여보, 당신을 위해 케이크를 만들었어. 받아. 선물이야!’하고 건넬 때 아내가 ‘그래? 고마워!’하며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죄의 종노릇하고 죽음의 종노릇하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최고의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불의한 이 세상에 보내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를 위해 최고의 의를 준비했어. 세상이 말하는 의가 아니고 바로 내 의, 나 여호와의 의를 준비했거든. 내가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너희의 불의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너희에게 내 의를 값없이 주려고 해. 그러니 받아. 선물이야!’라고 하실 때 받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불의로 가득했던 이 세상을 하나님의 의로 가득한 나라(하나님의 나라)로 새롭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나라를 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말의 의미예요.

 

결국 바울이 하는 말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용납과 환대에 기초한 선물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선물로서만 주어지지 법으로 요구하거나 강제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옳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우리는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은혜가 아닌 방식, 무조건적인 용서와 환대가 아닌 방식으로는 절대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방식으로만, 오직 무조건적인 용서와 환대의 방식으로만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대면하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오직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의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연히 은혜로 대해야 합니다. 법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대해야 그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서로가 법으로 대한다면, 일거수일투족마다 법을 들이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히 만인이 만인과 싸우고 소송하느라 날밤을 새울 것입니다. 사사건건 부딪칠 것이고,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승강이 할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피와 죽음의 굿판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날마다 이런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법으로 심판하고 심판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예, 법으로는 결코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법으로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지 못합니다. 오직 조건 없이 용서하고 조건 없이 환대해야 합니다. 조건 없이 용서하고 조건 없이 환대해야 비로소 의에 안착할 수 있습니다. 조건 없이 용서하고 조건 없이 환대해야 비로소 우리 속에서 발광하던 불의의 기운이 수그러들고 잦아들며 고요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법으로 확보된 적이 없습니다. 힘으로 성취된 적이 없습니다. 협상으로 얻어진 적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값없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선물로만 현실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도 이 선물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선물합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물합시다. 서로를 은혜로 대합시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조건 없이 용서하고 조건 없이 환대합시다. 이것이 의의 나라(하나님나라)를 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