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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2-하나님의 복음, 낯선 도발

2018.07.08 16:45

정병선 조회 수:150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로마서1:1-4  
음성듣기 http://www.logospringch.org/mp3/180708_SabbathPreaching.mp3
MP3다운 http://www.logospringch.org/mp3/180708_SabbathPreaching.mp3
영상다운 https://www.youtube.com/watch?v=pKWeXpti0oM

 

  (MP3 듣기: 2018년 7월 8일 주일예배설교)  

https://www.youtube.com/watch?v=pKWeXpti0oM

 

바울은 인사말 서두에서 자기가 전할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앞으로 할 이야기가 하나님의 복음이랍니다. 로마서를 통해 자기가 할 이야기는 자기 소견이나 논문이나 창작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복음, 정말 굉장한 말입니다. 먼저 ‘복음’이라는 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기쁜 소식’(εὐαγγέλιον-good news)이라는 뜻입니다. 충고나 훈계나 이론이 아니고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소식 - 뉴스에요. 예를 들면 기원전 5세기 후반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3차례 전쟁이 있었습니다(BC492-479). 역사에서는 그 전쟁을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하는데 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가 대승을 거뒀습니다(BC 490년). 이때 아테네 용사 페이디피데스(Pheidippedes)가 무장한 채로 40㎞를 달려 아테네 시민에게 승전 소식을 전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승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려 “우리가 승리했다”고 외쳤습니다. 페이디피데스가 전한 이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10년 후 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아테네 군대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BC 480년). 이때의 승전 소식도 복음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무엇이 복음일까요? 1945년 8월 15일에 있었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복음이었습니다. 또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것도 온 국민이 환호하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 당시에는 뭐가 복음이었을까요? 그때는 로마가 패권을 장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것이 유앙겔리온(복음)이었습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새로운 희망을 갖고 새로운 황제의 등극 소식을 기뻐했습니다. 신전에서는 제사를 올리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이라는 말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 위험천만한 진실

 

바울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행위와 연결했습니다. ‘복음’과 ‘하나님’을 연결해서 ‘하나님의 복음’(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이라는 말을 하나님께 끌어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을 위험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황제를 숭배하지도 않고, 또 이 말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도 위험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는 매우 도발적이고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 속에는 매우 도발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 속에는 아테네가 승리한 것, 새로운 로마 황제가 등극한 것은 복음이 아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로마 황제가 등극한 것을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환호하는데 그것은 진짜 복음 아니다, 진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했다는 소식이다, 이것이 진짜 복음이다, 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로마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뒤흔드는 너무나도 도발적이고 위험천만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로마 체제의 중심에 살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중심 도시에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로마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뒤흔드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복음’이라는 말을 ‘하나님’과 연결시킨 것은 바로 이 메시지 - 이 세상의 모든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는 위험천만한 메시지를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은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를 뿌리째 부정하고 뒤흔드는 소식(news)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치체제 중에 가장 발달한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자유롭고 건강한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회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자본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에는 로마 체제뿐 아니라 현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도 부정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만이 궁극적인 복음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남북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 간에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복음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복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남북통일이 하나님의 복음은 아닙니다. 남북통일이 하나님의 기적 같은 개입으로 성취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무병장수나 만사형통 또한 하나님의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복음일까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기쁜 소식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인간에게서 비롯되거나 역사에서 비롯된 소식은 아무리 아름답고 복된 소식이라도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복된 소식이라야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 하나님에게 속한 것만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톰 라이트의 표현을 따르면 하나님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세상이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는 소식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이것이 복음이다. 33쪽).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하나님의 복음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말을 했습니다. 1장 1절부터 7절에 이르는 짧은 인사말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v1,6,7),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고 직분을 받았다(v1,5),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다(v7)고 거듭거듭 수동태로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에 자기가 능동적으로 보태거나 빼거나 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자기는 하나님께 듣고 받은 것을 전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2절도 보겠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이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것은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인데, 특히 하나님이 오래 전에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진심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한 일이고, 하나님이 오래 전에 하신 약속과 관련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전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v2), 즉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분,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분, 바로 그분에 대한 소식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입니다(v3).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이 창안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 발견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 개발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라고 하는 종교적 천재가 창작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욕망이 투사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세상에 가져온 소식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고 성취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관계입니다. 달리 말하겠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하나님으로 인해 일어났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세상이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는 소식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소식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는 이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영국의 신약학자 톰 라이트의 말을 들어봅시다. “교회는 말한다. 여기에(성경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가 있습니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아내, 더 나은 남편(더 나은 부모)이 되는 것을 도와줄 기술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을 위해 당신을 바른 길로 가게 해 줄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이 충고를 받아들이십시오. 이 기도를 따라 하고 구원을 받으세요.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방법을 알려 줍니다.”(이것이 복음이다. 15쪽)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없고 도덕을 훈계한 적이 없는데 많은 교회는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지혜로운 처세술을 가르치고 도덕을 훈계하기에 바쁩니다. 수많은 설교를 들어보세요.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 처세술, 도덕이 거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로 인해 세상이 얼마나 다른 곳이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아요. 그것이 진짜 복음인데 진짜 복음은 설교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 처세술, 도덕만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의 만남

 

하나님의 복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 처세술, 도덕이 아닙니다. 세계 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은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석가모니 이야기나 공자 이야기나 소크라테스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요 세계 내 이야기이기 때문에 들으면 이해가 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끄덕여집니다.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10년, 20년, 70년, 80년을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돼요. 공감도 안 되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어요. 어느 때는 확실한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텅 비어 있고,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가 하는 것까지 헛갈리기도 합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1:23)이라고. 예, 하나님의 복음은 한없이 미련한 것이고 거리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복음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도 않고,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지도 않습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롬9:16). 정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간절히 원한다고 주어지지 않아요. 열심히 달음박질 한다고 얻어지지 않아요. 깊이 기도하고 명상한다고 깨달아지지 않아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열립니다. 애당초 복음을 계획하신 분이 하나님이니까. 복음을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여러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아들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열립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십니다. 우리가 보태거나 뺄 게 하나도 없어요. 100%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100% 수동적으로 받을 뿐이에요. 그분의 부르심에 수동적으로 응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이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이 교차하는 곳에 있습니다. 0.00001%라도 인간의 능동성이 요청되고 인정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100%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특성입니다.

물론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인간의 수동성을 강화한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로 만든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임으로서 살리는 분입니다. 인간을 부정함으로써 긍정하고, 심판함으로써 구원하고, 위기에 빠트림으로써 건져내고, 종이 되게 함으로써 주체로 세우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복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의 수동성을 통해서 능동성을 회복시킵니다. 너무 신묘막측해서 잘 이해되지 않지만 어쨌든 사실이에요.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이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이 교차하는 곳에 있습니다.

 

역사와 비역사의 만남

 

또 하나님의 복음은 역사와 비역사가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역사와 비역사가 교차하는 곳에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오래 전에 약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몸으로 말하면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이 한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역사와 함께 호흡하면서 면면이 이어져온 일이라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역사와 함께 호흡해왔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진행돼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역사적이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났지만(역사적임)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됐다(비역사적임)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부활은 초역사적 사건입니다. 물론 이 일도 일차적으로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천 년 전 예루살렘 외각의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고, 한 번도 반복된 적이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의 부활은 비역사적 사건, 초역사적 사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활 생명은 역사 속에 없는 생명입니다. 역사 속 모든 생명은 다 죽음에 먹혔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다 죽음에 갇힌 생명이고, 역사의 한계 안에 갇힌 생명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의 장막을 걷어낸 생명입니다. 시간의 한계, 역사의 한계를 넘어선 생명입니다. 죽음을 죽이고 일어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이 어찌 해볼 수 있는 생명이 아니에요. 의학이 발달하고 유전자 공학이 발달한다고 해서 실현 가능한 생명이 아니에요. 부활 생명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비역사적인 생명입니다. 그리고 비역사적인 생명에 대한 소식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달리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시간 속 생명을 오래 연장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간 속 생명을 북돋아주고 잘 살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간 속 생명을 잘 되게 하는 비법을 설교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역사 속 생명이 부귀영화를 얻는다고 설교합니다만 그런 것은 애당초 하나님의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역사적 생명을 잘 되게 하고 잘 살게 하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넓고 깊고 풍성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오히려 역사적 생명을 죽입니다. 역사적 생명을 죽임으로써 역사의 한계를 넘어선 생명을 살게 합니다. 역사적 생명을 파멸시킴으로써 죽음을 넘어선 생명, 즉 부활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살게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난감하지요. 그러나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비역사적인 생명이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바꿔 말하겠습니다. 역사적이기만 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닙니다. 비역사적이기만 한 것도 하나님의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역사와 비역사가 만나는 곳, 역사와 비역사가 교차하는 곳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이 교차하는 곳에 있고, 하나님의 비역사성과 인간의 역사성이 교차하는 곳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땅이 만나고 교차하는 곳, 하늘과 땅이 만나 서로 소통하고 통합을 이루는 곳(엡1:10), 바로 거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세상의 복음과 하나님의 복음

 

세상의 모든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복음은 어떤 것이든 예외 없이 세계 내적이고 역사적입니다. 어떤 종교이든, 어떤 정치체제이든, 어떤 사상이든 다 인간의 희망, 인간의 욕망, 인간의 이상,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능동성에 있지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이 교차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역사성과 인간의 역사성이 교차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덧없고 허접합니다. 솔직히 세상의 복음은 모래 위에 성을 쌓은 것과 같고, 감옥에 궁궐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혁명이 천만 번 일어나고, 도덕적 회심이 천만 번 일어나도 세계 내적일 뿐이고 역사적일 뿐입니다. 쳇바퀴 안의 다람쥐가 열심히 돌아도 같은 쳇바퀴를 도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요.

하나님은 이런 허무한 쳇바퀴를 정지시켰습니다. 역사의 쳇바퀴가 계속 도는 것을 정지시켰습니다. 지금까지 돌고 돌았던 역사의 쳇바퀴를 정지시키고 새로운 쳇바퀴를 돌리셨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낯설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죽음을 죽이고 일어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이 소식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바로 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왜 진짜 유앙겔리온인지를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바울을 통해, 특히 로마서를 통해 진짜 복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의 세계를 하나하나 세심히 살피고 귀 기울여 들을 텐데 아무쪼록 듣는 귀가 열려서 진짜 복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귀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