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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2012.09.16 00:00

정병선 목사 조회 수:2142

설교자 정병선 목사  
예배명 주일예배  
성경본문 창세기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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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분이면서 동시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고, 가장 많이 닮았지만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사람과 개 사이에는 많은 부분에서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개가 주인의 눈치도 살필 줄 알고, 주인이 감동할 만큼 주의의 감정을 읽을 줄도 압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도 압니다. 최소한의 말귀도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주인과 인격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갖지는 못합니다. 주인과 대화하면서 주인의 인생 고민을 나누지는 못합니다. 개와 사람 사이에는 상당 부분 교감도 이루어지지만,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도 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도 비슷합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도 상당 부분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개가 주인을 알아보는 것만큼 사람도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이 뭘 기뻐하고 싫어하는지를 알아요. 3-4살 먹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알 것 다 압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다 압니다. 아이들 속에 어른이 들어앉아 있는 걸 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깨닫습니다.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능력이 어느 정도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개가 사람을 다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습니다. 타락 이후는 말할 것 없고, 타락 이전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엄청난 존재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이해의 한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가장 가깝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고, 가장 많이 닮았지만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의 차이가 있고, 하나님을 알만한 지혜가 있지만 결코 다 알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복잡한 것입니다. 아예 모르면 복잡할 게 없습니다. 아예 모르면 모르는 체로 살면 속 편합니다. 하나님께 다가가려고 애쓸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고 미묘하고 수많은 오해와 뒤틀림과 왜곡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유를 통해서, 종교적인 수련을 통해서, 정치적인 일치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간격을 메꾸어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몇몇 사람은 그런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는 경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생명의 신비와 삶의 이치를 깨닫는 경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노자나 장자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하나님의 신비에 많이 근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것이나 노자가 말한 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은 걸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아주 허황되고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망상에 빠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천태만상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틈을 건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인간이 영영 결별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은 죽음을 사는 것이지 삶을 사는 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교재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거대한 틈 자체를 없앨 수는 없고, 그렇다고 영영 떨어져서 살아서도 안 되고,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일은 인간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피조물로서는 할 수 없어요. 죽었다 깨어나도, 천만 년을 진화하고 또 진화한다 해도 피조물이 창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은 창조하신 분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을 열어 보이는 계시를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 여기 있다’면서 계시의 다리를 놓고, ‘내가 계시의 다리를 놓았으니, 너는 믿음으로 그 계시의 다리를 건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리고 계시만 갖고는 안 되니까 언약까지 맺은 겁니다. ‘네가 믿음으로 계시를 좇아오면, 하나님이 왕 노릇하는 나라가 유업으로 기다리고 있다’고 언약을 맺은 거예요. 아담과도 언약을 맺었고, 아브라함과도 언약을 맺은 거예요.  

이것은 타락 이전이나 이후나 똑 같습니다. 아닙니다. 믿음의 방식으로라야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이 진실은 천국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고전13:13)이라고. 저는 바울의 이 말을 100% 그대로 믿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기에 앞서 지금과 종말론적 미래를 대비시켰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것을 온전히 알게 될 그 때가 오면 예언도 없어지고, 방언도 없어지고, 지식도 없어질 것이라고. 그런데 이런 대비를 하고 나서 곧바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게 되는 그 때에도 믿음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믿음은 타락한 죄인으로 사는 이 땅에서만 필요한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천국에서도 필요한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 그리고 우리가 피조물인 한 믿음으로 교제하고 소통하는 이 방식은 영원히 폐기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나라는 사랑으로만 충만한 나라가 아니라 믿음과 소망으로도 충만한 나라입니다. 사실입니다. 믿음은 죄인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방편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사는 한 결코 피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이자 앎의 양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모든 신앙 지식은 다 믿음을 통해 얻은 앎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신다는 것, 용서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신다는 것, 하나님나라가 도래한다는 것, 이 모든 지식은 다 믿음을 통해 얻은 앎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나 과학을 아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역사나 과학 지식은 인간의 이성과 뇌를 통해 획득한 지식인데 비해 신앙 지식(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이성과 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지식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 깊이 공감하면서 그 말씀을 좇아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도, 평생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크고 작은 일상을 감사하는 것도 믿음의 지식에 눈을 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믿음의 지식에 기초해서 사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해요.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보고, 그 믿음의 지식에 기초해서 삶을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의 내용이 뭐냐, 믿음의 내용이 뭐냐 하는 문제는 또 복잡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각각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부를 때에 하신 말씀을 보면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를 때 뭐라고 했습니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음과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종교적인 삶을 살 수도 있고, 믿음으로 자기 집착을 강화할 수도 있고, 믿음으로 한풀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믿음으로 종교적인 삶을 사람, 믿음으로 자기 집착을 강화하는 사람, 믿음으로 한풀이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말하는 게 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자리를 떠나라는 이주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지리적인 장소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저급한 해석입니다. ‘너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나 지금 살고 있는 하란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요 나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사악한 땅이니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 선한 사람들이 사는 가나안 땅으로 옮겨라’, 이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또 이 말씀을 선교지로 떠나라는 명령으로 듣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아주 웃기는 일입니다. 또 모든 재물을 다 버리고 맨 몸으로 떠나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타당한 해석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떠날 때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떠난 게 아니라 다 갖고 떠났거든요(v.5).  

사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씀 속에는 단지 삶의 거처를 옮기라는 것보다 훨씬 깊고 본질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삶의 체계와 양식을 떠나라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체계와 양식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의 체계와 양식이고, 가인과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체계와 양식이고,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살았던 체계와 양식이니, 그걸 떠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땅에서 배우고 익힌 모든 가치관, 상식, 예절, 도덕, 지식, 정체성, 종교, 전통, 습관을 몽땅 뒤에 남겨 놓고 표표히 떠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삶을 떠받쳐주었던 모든 삶의 토대와 자아의 틀을 훌훌 벗어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떠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몸에 익은 이 세상의 가치관, 세계관, 상식, 종교, 전통, 예절, 습관, 정체성을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내려놓고 떠나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여줄 새로운 땅,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대를 떠나지 않으면, 이 세대의 유행과 삶의 양식과 체계를 떠나지 않으면,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왜장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환상이요 망상일 뿐입니다. 자기 혼자 자기 안에서 난리를 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실이에요. 떠남이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일은 떠남을 전제할 때 비로소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할까요? 우리가 떠나야 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무엇일까요? 두 말할 것이 없습니다. 자본주의적 가치, 자본주의적 체계,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입니다. 다 아는 것처럼 지금 이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입니다. 돈이 세상만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 세대는 말 그대로 자본이 중심인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미덕으로 추앙합니다. 갖가지 매혹적인 광고를 통해서 소비를 부추깁니다. 종내는 사람의 정체성까지도 소비자로 만들어버립니다. 보세요. 요즘 사람들은 뭔가를 구입할 때 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고가의 상품을 사용하고 걸칠 때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영화의 예술성이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영화를 보았다는데 의미를 둡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것보다는 소비했다는데 의미를 둡니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것도 뭔가를 많이 소비할수록 그 날을 멋지게 기념했다고 생각합니다. 값비싼 물건을 선물했다든지, 멋진 레스토랑에서 비싼 음식을 먹었다든지, 최고의 공연을 구경했다든지, 하여튼 많이 소비할수록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사랑도 예외가 아닙니다. 애인에게 돈을 많이 쓸수록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에도 소비의 양식이 깊이 들어왔습니다. 정말 그래요. 생활의 모든 것이 자본주의적 가치로 재편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소비자적 마인드, 소비자적 태도로 삽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적 가치, 자본주의적 체계,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소비의 양식, 소비자적 태도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가치와 생활양식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묵상하고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선교사로 헌신해 이 땅을 떠난다 할지라도,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본주의적 가치, 자본주의적 체계,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이 세대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믿음으로 사는 일은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떠나야 비로소 믿음으로 사는 일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떠남’을 좀 다른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표현했고, 에베소서에서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엡4:22)고 표현했고, 고린도전서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에 비추어 볼 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결국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단지 예수를 믿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삶의 가치관, 삶의 방향, 삶의 체계, 삶의 양식 전체와 뗄 수 없이 묶여 있습니다. 돈의 위력이 막강한 현실 앞에서 돈의 가치를 밟고 가는 것, 소비가 자랑이고 미덕인 현실 앞에서 소비자적 생활양식을 거부하는 것, 컴퓨터게임이 생활의 일부가 된 현실 앞에서 컴퓨터게임을 거부하는 것, 학벌이 지배하는 현실 앞에서 학벌 체제에 무릎 꿇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다 믿음으로 사는 것과 직결되어 있고, 떠나는 것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체계와 어긋나게 산다는 것은 한없이 복잡하고 미묘하고 애매모호한 일입니다. 삶이라는 게 본래 어렵고 복잡하고 미묘하고 애매모호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삶을 다른 방식으로 사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렵고 복잡하고 미묘하고 애매모호하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한없이 복잡하고 미묘하고 애매모호하고 불투명한 현실을 뚫고 현명하게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 때 비로소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별이요 떠남입니다. 떠남이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떠남이 없는 믿음은 가짜예요. 아무리 뜨겁고 열정적이라 하더라도 떠남이 없으면, 이 시대의 가치관과 삶의 양식 안에서 살면, 그 믿음은 가짜예요.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길로 떠나야 합니다.

물론 한 번 떠난다고 해서, 떠남이 완성되는 건 아닙니다. 이 떠남은 일평생 반복해야 하는 떠남이고,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했던 것처럼 날마다 순간마다 새롭게 결행해야 하는 떠남입니다. 그러나 이 떠남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이 떠남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이 떠남보다 더 지혜로운 일은 없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이 복된 떠남을 결행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이 복된 떠남을 날마다 새롭게 결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